Texts
그곳의 인물은 말이 없다
(박고운 개인전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서문)
김민훈
나는 박고운으로부터 개인전에 관한 글을 부탁받았을 때, 그리고 그것의 주제어가 내부 식민지로서의 제주임을 알았을 때, 머뭇거림을 가릴 수 없었다. 나에게 그곳은 휴양의 공간이며, 환기를 위한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열대 나무의 사진을 찍는다. 번호판이 하허호로 시작하는 차량을 대여한다. 귤 나무를 보며 미소 짓는다. 이따금 보이는 해녀와 말을 보며 감탄한다. 돌하르방과 귤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을 흉내 낸다. 올레를 걸으며 치유와 가까운 경험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이그조티시즘적 권력을 배태한 채 권력에 예속된 것들을 응시했다.
이렇게 변명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그가 나에게 전시를 위해 작성한 글을 전달했을 때 그것이 내언어에 상회했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제주는 쉽게 묵과된다.’고 시작하는 글에선 공허의 격랑이 맴돌았고, 그런 의미에서는 나도 죗값이 있으니 어찌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로컬리티 혹은 헤테로토피아에 관련한 논문을 몇 개 뒤적거리다가, 자기기만적인 작업이었음을 알고 이내 포기한다. 나는 그곳에 두고 온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전시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우회하기를 택하기로 한다.
# 공허 혹은 분노의 소급
철을 내려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온 사방을 메운다. 나는 달궈진 쇠 위에서 상하 운동을 반복하는 망치를 보며 덩달아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이 것은 박고운이 22년도에 단조 조각 <Hang on>을 제작할 때의 기억이다. 이전까지 박고운은 ‘끼어들기, 기생하기, 숨어들기’라는 언어로 본인을 정립하였기에, 그 기억은 더 강렬했다. 동료 작가의 변화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행운이고 또 늘 즐겁지만, 이토록 큰 변화를 목도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쩔 도리 없이 그 원인을 추측하게 된다.
같은 시기의 조각 <유기체의 생존 기법>에서 나는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길가에 버려진 나뭇가지를 주워 조각을 하곤 하던 그는, 어느 순간 그 나뭇가지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 애벌레를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모종의 열망을 느꼈다고 한다. 타 행위자에 의해 삶의 터전 혹은 생명까지 뺏기는 작은 유기체를 보며 본인의 현 위치에 대해 재고하게 된 것은, 해당 작업에서 작은 애벌레 조각에 가닿는다. 그것들은 삶의 목적인 변태의 과정을 타의로 박탈당했다. 번데기가 되지 못한 애벌레는 나무껍질과 함께 탈락되어 터전을 상실한다. 그런 까닭에, 삶을 빼앗긴 ‘원주민’ 애벌레 조각 옆에 길었던 본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것을 엮어 병치한 장면은 유감의 표현이자 정서적으로 강렬하게 읽힌다.
# 나무 깎는 여자
나는 그가 말해준 일화 하나가 기억난다. 공원에서 과도로 나무를 깎고 있던 그에게 ‘시발 아저씨’가 접근했고, 온갖 비속어를 내뱉더니 이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보고 줄행랑쳤다고 한다. 현장에서 타의로 ‘시발년’이 되고, 곧이어 ‘칼 든 미친년’이 되며 본인의 사회적 위치를 재고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덤덤한 목소리에서, 나는 분노의 배경에 흐릿하게 동화된다. 박고운은 이제 ‘숨어듦’의 유충 상태였던 본인을, 완전히 재구성하여 ‘분노’의 성충으로 거듭난다.
박고운의 작업이 뿜어내는 공허와 분노의 이미지는 이제 본인의 과거를 재창안하여 새로운 현재을 빚어내는 것 같다. 이쯤에서, 나는 그가 원래 부탁했던 전시에 관한 글을 써보기로 한다. 이번 전시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에서 그는 제주에서 성장한 본인의 서사를 통해 풍경을 연출하는데, 이전의 작업에서 이어져 온 감정적 에너지, 그러니까 공허와 분노가 ‘원주민’이었던 제주에서의 기억을 톺아내는 모양새다.
공간 가운데에 상반된 제목의 두 작업이 눈에 띈다. 창 밖의 가로등을 은유하는 조명이 설치된 창문 조각 <보이지 않는 것>과 스티로폼을 얼기설기 조각내어 지형 모형을 흉내 낸 조감 조각 <보이는 것>이다. 나는 우선 이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언제나 내부에서 욕망하는 것은 외부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이 정설은 창문에 비유했을 때 흥미롭게 변하는데, 외부가 아름답고 찬란할수록 내부의 값어치는 상승하기 때문이다. 리버뷰, 오션뷰 혹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티뷰의 값감이 이를 방증한다. 그뿐인가. 내부의 사람들은 외부의 사람이 본인을 들여다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높은 곳을 원한다. 그곳이 권력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곳에 위치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간 가운데에 놓인 창문 작업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박고운이 보는 외부는 무엇일까?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창문 너머에는 다시 창문이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내부의 가치를 설정할 외부가 부재한다. 외려, 외부 존재의 응시를 상정하며 권력에 예속되기를 자처한다. 내부에서 다시 내부를 바라볼 때, ‘여기에 존재함’과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의 감각은 동시에 강화된다. 전자는 까다로운 불쾌함으로, 후자는 상황을 타개하려는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은 대체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물길이 있는 지형과 옹기종기 모인 작은 집들이 보인다. 과거의 지식인들은 제주를 민족적 신성의 공간인 한라산과 그 외부 잉여 지역의 집합으로 인식했는데, 여기에서 박고운은 타의에 의해 열등한 지역으로 구획된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원주민과 제주의 자치 능력을 상징하는 제주읍성을 내려다본다. 창 밖은 보이지 않으나, 섬은 높은 곳에서 굽어보인다. 즉, 박고운에게 까다로운 불쾌함은 권력에 예속된 창 속 존재로, 상황을 타개하려는 욕망은 새의 시점으로 발현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병치 관계는 끊임없이 대상화되는 제주 속에서 보이지 않는 육지에 대한 욕망과 그 속에서 살아내는 원주민의 관계를 유비한다. 나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가 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삶의 터전으로서 제주는 쉽게 묵과된다. (중략) 제주는 중앙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과 육지의 욕망에 맞추어 변화하는 제주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박고운이 보이지 않는다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육지로부터 탈락되어 텅 비어버린 제주의 욕망 주체다.
제주의 욕망 주체. 나는 그것에서 생각이 머물러 서성이다가 이내 연꽃과 옷걸이를 발견한다. 그것은 아무렇게 걸려 있는 옷가지 조각 <두고 온 것>과 추모의 조각 <죽은 아빠>다. 제주는 타의로부터 강인한 여성의 서사를 지속적으로 부여받고 있으니, 죽은 남성에 대한 서사는 특히 의미심장하다. 박고운의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것들은 두고 온 것이다. 보편의 조각이며,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이 말은 곧, 자전적 경험을 객관화하기로 한 것과 다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남쪽의 섬에 그가 두고 온 것들은 공동체의 기억으로 호명된다. 두고 온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북쪽의 육지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는다. 그 줄기에는, 언제 떨어질지 몰라 바들거리는 애벌레가 살고 있다. 나는 여기서 그가 제주의 욕망 주체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어슴푸레 느낀다.
결국, 박고운은 전시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에서 제주가 어떻게 정의되고 있느냐 묻는다. 시대의 욕망에 의해 발견되고 창조된 ‘제주적인 것’이 원주민을 어떻게 지워냈는지 묻는다.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나는 어느새 국가에서 제주로, 또 제주에서 누군가의 집 안에 서있다. 나는 그곳에 두고 온 것이 없으므로, 답변을 회피하고 창밖을 바라본다. 멀리서 ‘분노’의 성충이 날아간다.
여기 네 여자의 술상이 한창이다. 그곳의 인물은 말이 없다. 목소리를 소거 당한 채 앉아있다. 그런데 이제는 어째서인지,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박고운 개인전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서문)
김민훈
나는 박고운으로부터 개인전에 관한 글을 부탁받았을 때, 그리고 그것의 주제어가 내부 식민지로서의 제주임을 알았을 때, 머뭇거림을 가릴 수 없었다. 나에게 그곳은 휴양의 공간이며, 환기를 위한 여행지이기 때문이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열대 나무의 사진을 찍는다. 번호판이 하허호로 시작하는 차량을 대여한다. 귤 나무를 보며 미소 짓는다. 이따금 보이는 해녀와 말을 보며 감탄한다. 돌하르방과 귤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을 흉내 낸다. 올레를 걸으며 치유와 가까운 경험을 느낀다. 나는 그렇게 이그조티시즘적 권력을 배태한 채 권력에 예속된 것들을 응시했다.
이렇게 변명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그가 나에게 전시를 위해 작성한 글을 전달했을 때 그것이 내언어에 상회했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제주는 쉽게 묵과된다.’고 시작하는 글에선 공허의 격랑이 맴돌았고, 그런 의미에서는 나도 죗값이 있으니 어찌 편한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로컬리티 혹은 헤테로토피아에 관련한 논문을 몇 개 뒤적거리다가, 자기기만적인 작업이었음을 알고 이내 포기한다. 나는 그곳에 두고 온 것이 없다. 그러므로, 전시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우회하기를 택하기로 한다.
# 공허 혹은 분노의 소급
철을 내려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온 사방을 메운다. 나는 달궈진 쇠 위에서 상하 운동을 반복하는 망치를 보며 덩달아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이 것은 박고운이 22년도에 단조 조각 <Hang on>을 제작할 때의 기억이다. 이전까지 박고운은 ‘끼어들기, 기생하기, 숨어들기’라는 언어로 본인을 정립하였기에, 그 기억은 더 강렬했다. 동료 작가의 변화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행운이고 또 늘 즐겁지만, 이토록 큰 변화를 목도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쩔 도리 없이 그 원인을 추측하게 된다.
같은 시기의 조각 <유기체의 생존 기법>에서 나는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길가에 버려진 나뭇가지를 주워 조각을 하곤 하던 그는, 어느 순간 그 나뭇가지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 애벌레를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모종의 열망을 느꼈다고 한다. 타 행위자에 의해 삶의 터전 혹은 생명까지 뺏기는 작은 유기체를 보며 본인의 현 위치에 대해 재고하게 된 것은, 해당 작업에서 작은 애벌레 조각에 가닿는다. 그것들은 삶의 목적인 변태의 과정을 타의로 박탈당했다. 번데기가 되지 못한 애벌레는 나무껍질과 함께 탈락되어 터전을 상실한다. 그런 까닭에, 삶을 빼앗긴 ‘원주민’ 애벌레 조각 옆에 길었던 본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것을 엮어 병치한 장면은 유감의 표현이자 정서적으로 강렬하게 읽힌다.
# 나무 깎는 여자
나는 그가 말해준 일화 하나가 기억난다. 공원에서 과도로 나무를 깎고 있던 그에게 ‘시발 아저씨’가 접근했고, 온갖 비속어를 내뱉더니 이내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보고 줄행랑쳤다고 한다. 현장에서 타의로 ‘시발년’이 되고, 곧이어 ‘칼 든 미친년’이 되며 본인의 사회적 위치를 재고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덤덤한 목소리에서, 나는 분노의 배경에 흐릿하게 동화된다. 박고운은 이제 ‘숨어듦’의 유충 상태였던 본인을, 완전히 재구성하여 ‘분노’의 성충으로 거듭난다.
박고운의 작업이 뿜어내는 공허와 분노의 이미지는 이제 본인의 과거를 재창안하여 새로운 현재을 빚어내는 것 같다. 이쯤에서, 나는 그가 원래 부탁했던 전시에 관한 글을 써보기로 한다. 이번 전시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에서 그는 제주에서 성장한 본인의 서사를 통해 풍경을 연출하는데, 이전의 작업에서 이어져 온 감정적 에너지, 그러니까 공허와 분노가 ‘원주민’이었던 제주에서의 기억을 톺아내는 모양새다.
공간 가운데에 상반된 제목의 두 작업이 눈에 띈다. 창 밖의 가로등을 은유하는 조명이 설치된 창문 조각 <보이지 않는 것>과 스티로폼을 얼기설기 조각내어 지형 모형을 흉내 낸 조감 조각 <보이는 것>이다. 나는 우선 이것에 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언제나 내부에서 욕망하는 것은 외부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한 이 정설은 창문에 비유했을 때 흥미롭게 변하는데, 외부가 아름답고 찬란할수록 내부의 값어치는 상승하기 때문이다. 리버뷰, 오션뷰 혹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티뷰의 값감이 이를 방증한다. 그뿐인가. 내부의 사람들은 외부의 사람이 본인을 들여다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높은 곳을 원한다. 그곳이 권력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곳에 위치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간 가운데에 놓인 창문 작업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박고운이 보는 외부는 무엇일까?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창문 너머에는 다시 창문이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는 내부의 가치를 설정할 외부가 부재한다. 외려, 외부 존재의 응시를 상정하며 권력에 예속되기를 자처한다. 내부에서 다시 내부를 바라볼 때, ‘여기에 존재함’과 ‘여기에 존재하지 않음’의 감각은 동시에 강화된다. 전자는 까다로운 불쾌함으로, 후자는 상황을 타개하려는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은 대체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물길이 있는 지형과 옹기종기 모인 작은 집들이 보인다. 과거의 지식인들은 제주를 민족적 신성의 공간인 한라산과 그 외부 잉여 지역의 집합으로 인식했는데, 여기에서 박고운은 타의에 의해 열등한 지역으로 구획된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원주민과 제주의 자치 능력을 상징하는 제주읍성을 내려다본다. 창 밖은 보이지 않으나, 섬은 높은 곳에서 굽어보인다. 즉, 박고운에게 까다로운 불쾌함은 권력에 예속된 창 속 존재로, 상황을 타개하려는 욕망은 새의 시점으로 발현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병치 관계는 끊임없이 대상화되는 제주 속에서 보이지 않는 육지에 대한 욕망과 그 속에서 살아내는 원주민의 관계를 유비한다. 나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가 한 말을 인용하고 싶다. ‘삶의 터전으로서 제주는 쉽게 묵과된다. (중략) 제주는 중앙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과 육지의 욕망에 맞추어 변화하는 제주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박고운이 보이지 않는다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육지로부터 탈락되어 텅 비어버린 제주의 욕망 주체다.
제주의 욕망 주체. 나는 그것에서 생각이 머물러 서성이다가 이내 연꽃과 옷걸이를 발견한다. 그것은 아무렇게 걸려 있는 옷가지 조각 <두고 온 것>과 추모의 조각 <죽은 아빠>다. 제주는 타의로부터 강인한 여성의 서사를 지속적으로 부여받고 있으니, 죽은 남성에 대한 서사는 특히 의미심장하다. 박고운의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것들은 두고 온 것이다. 보편의 조각이며,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이 말은 곧, 자전적 경험을 객관화하기로 한 것과 다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남쪽의 섬에 그가 두고 온 것들은 공동체의 기억으로 호명된다. 두고 온 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북쪽의 육지에 편입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는다. 그 줄기에는, 언제 떨어질지 몰라 바들거리는 애벌레가 살고 있다. 나는 여기서 그가 제주의 욕망 주체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어슴푸레 느낀다.
결국, 박고운은 전시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에서 제주가 어떻게 정의되고 있느냐 묻는다. 시대의 욕망에 의해 발견되고 창조된 ‘제주적인 것’이 원주민을 어떻게 지워냈는지 묻는다.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니, 나는 어느새 국가에서 제주로, 또 제주에서 누군가의 집 안에 서있다. 나는 그곳에 두고 온 것이 없으므로, 답변을 회피하고 창밖을 바라본다. 멀리서 ‘분노’의 성충이 날아간다.
여기 네 여자의 술상이 한창이다. 그곳의 인물은 말이 없다. 목소리를 소거 당한 채 앉아있다. 그런데 이제는 어째서인지,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