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update : 2026.01.02.                            mminh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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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력은 유죄이거나 무죄
          (Gravity Doesn’t Choose 전시 서문)

          김민훈



        이른 더위에 지쳐 돌아가던 길에, 나는 이혜지로부터 중력이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문자를 받았다. 무엇을? 나는 덜컹거리는 버스에 뉘인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흔들리는 몸 위에서 작은 금 티끌이 반짝였다. 【돌 된 것을 위한 반짝이 요람】에서 묻어나온 것이다. 그것은 나무 화석에 대한 것이었는데,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살아갈 시간을 아득히 초과한 세월에 걸쳐, 나무의 본 성분이 빠져나가고 광물질로 치환되며 이루어진, 아주 집요한 침윤의 결과에 대한 경의 비슷한 것이었다. 그 모든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중력에 의한 퇴적일 터이다.

        한 층, 그리고 또 한 층… 나무가 돌이 되기까지, 그 위로 얼마나 많은 계절이 쌓여야 했나? 중력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시간이 고였고, 지금 그것을 정말로 내 손 위에 들고 있다. 나는 다시, 쌓여가는 것들에 대해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조각들을 이리저리 놓을 때 이혜지가 나에게 우리가 쌓는 방식이 겹쳐 보인다고 했기도 했거니와, 그 말은 나로 하여금 각기 다른 시간들이 포개지는 하나의 시계열을 떠올리게 했고, ‘직립’이 아닌 ‘기립’이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느냐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질문과도 닿았기 때문이다.

        중력과 씨름하며 쌓은 것들이 보인다. 개중엔 【여러 색의 흙 장승】이나 【뜨겁게 달궈져 스스로의 표면을 봉합해간 흙 반죽】이 있다. 나는 이혜지가 무언가의 집을 닮은 것을 한 단 한 단 얹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가 만든 무수한 ‘받침’들을 떠올렸다. 무엇인가를 위로 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툰 균형을 이루며 자립하는 것들. 한 층, 그리고 또 한 층 더. 이제야 중력과 더 친한 것들이 보인다. 개중엔 【뿌리】이거나 【뿌리를 닮은 것】과 【무언가를 포장하고 있던 막】이 있다. 그 기저에는 땅과의 접촉면에서 다시 살아나려는 의지가 있고, 끊임없이 탈락될 피부의 주름이 있다. 사이사이 틈에서 나는 또 다른 것들이 보인다. 개중엔 【미술사의 한 도판을 닮은 것】과 【위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흙의 고리】가 있다. 그것들은 완결되지 않은 채 무게에 기대 있었고, 견고함을 가장하면서도 언제든 해체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이 모든 장면은 애석하게도 성공이 예정되지 않은 사랑과 다름 아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걸었다. 더위와 강도 높은 육체노동에 맞물린 빗방울에 순간 푹, 하고 어지러움, 순간 부끄럽고 낭만적이게도 내가 실패한 사랑의 얼굴과, 호랑이는 밤에 찾아온다는 누군가의 울부짖음을 떠올렸다. 오늘 밤엔 전화를 해야지. 여전히 모든 것이 중심을 잃은 것처럼 보였기에 화단에 기댔고, 늦깎이 나리꽃 한 송이가 울창한 덤불 밑에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 흙과 더 가까운 쪽에 기대어 핀 꽃. 빛을 못 받아 늦었나, 열심히 빛을 찾아 기울었구나. 뿌리 내린 자리는 애초에 스스로 정한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곧 몇 해 전, 친구가 식물의 중력굴성(gravitropism)에 관해 말한 것이 기억났다. 식물은 위와 아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중력의 방향을 따라 자란다고, 뿌리는 아래로, 줄기는 위로, 그 움직임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몸 안에 든 무거운 입자들이 세포의 바닥으로 가라앉아 만드는 반응이라고, 그리고 빛을 향해 줄기가 휘는 건 또 다른 원리라고, 식물은 빛을 감지해 그곳으로 나아간다고, 그것을 광굴성(phototropism)이라고 부른다고. 그러니까 내 앞에 이중의 방향성이 놓여 있던 것이다. 중력이 당기는 쪽과 빛이 비치는 쪽 그 사이. 거기서 나리꽃은 애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중력은 언제나 유죄이고, 동시에 언제나 무죄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고, 무엇도 차별하지 않았지만, 그 무심함이 나리꽃을 그늘에 붙잡았다. 중력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기에 누구도 그것을 탓할 수 없지만, 너를 기울이게 만들기에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너는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나리꽃이 그러하듯, 너 역시 보이지 않는 무게에 반응하여 어딘가에 기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염려는 아무래도 사랑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기울기조차 감당하겠다는 고백일 것이다. 너를 향해 내가 가진 몸을 기울이겠다는 다짐과 너의 기욺을 좋아하겠다는 다짐. 한데 그것은 언제나 실패일 수 있다. 중력은 그 무엇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은 언제나 평형보다는 균열이고, 지탱보다는 흔들림일 터이다. 빛을 향했기에 그림자는 드리우고, 사랑은 늘 그림자의 위치에서 박동하니까. 우리의 몸이 어디로 기울었는지를 알려주는 건 언제나 빛이 아니라 그림자니까.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그림자】가 빛을 향한 열망의 기척처럼 일렁이고 있다. 태양 빛이 미워 나무의 그림자를 찾았건만, 그 그림자마저 결국 빛이 남긴 것이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너를 향한 기울기를 잃을 수 없다는 것을, 지난 겨울 내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혜지는 흙을 사랑한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다. 그가 흙을 통해 행한 것들은 틀림없이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같이 걷는 길에 그가 다른 물질과 접촉하고 싶다고 했을 때에도, 나는 그가 흙에서 일깨운 감각을 언제나 잊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흙은 우리에게 시작이자 귀환인 곳 아니었나? 때로는 나무가 돌이 되듯, 마술을 부리는 바로 그곳 말이다. 【견고해지기엔 낮은 온도로 소성된 흙 반죽】이 실제로 바람과 비를 맞으며 천천히 외피를 벗을 때, 【흙을 찍은 사진】이 하느작거릴 때, 그는 분명 흙이 움직이는 속도에 마음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이혜지는 【바닥에 부은 흙】을 매만지다가, 가족이 기른 나무에 과실이 열렸다고 웃었다. 그 과실이 중력에 의해 흙에 떨어져 【닿은 순간】, 아주 작은 삶에 의해 중력과 빛 사이의 줄다리기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흙은 무언가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받아낸다. 그렇다면 그곳, 흙이야말로 모든 종류의 준비가 가능해지는 곳일 거다. 비로소 더 나음에 대한 소망들이 읽힌다. 비록 성공이 예정되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우리가 만든 이 모든 조각들 속에서 빛나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나름 볕이 드는 책장에 올려놓은, 태평양을 건너서 왔다는 작은 몸에 푸른빛이 돋아나 있었다. 정확히 볕이 드는 방향으로. 그렇다면 기우는 것과 끌어당기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작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노력 앞에 중력은 언제나 유죄이고 무죄이므로.


이 글에서 【】는 작품의 명칭이거나 그것을 묘사한 것의 표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