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update : 2025.07.23.                            mminh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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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움과 기억 사이

          이한범

전시장을 한참 서성이다가 불현듯 내게 떠오른 말은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움, 아름다움이라니… 꽤 오랫동안 미술의 관객으로 지내면서도 거의 잊다시피 한 것, 오래도록 꺼낼 일 없어 그 위로 천천히 먼지가 쌓이는 바람에 마치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고요한 사물 같은 게 되어버린 그것 말이다. 여기 이곳에 들어설 때에도, 우뚝 서 있는 조각들 사이를 한참 동안 서성거리는 와중에도 나는 이것들이 ‘아름답다’라고 느끼지도, 그러하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다만 그것은 시차적으로 내게 당도한 말이었다. ⟪나뭇등걸⟫에 대한 나의 최초의 구조화된 감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조각들 사이에서 서서 이 시차에 대해 생각했다. 조각을 보고 공간을 걷던 몸은 어느덧 시차적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는 몸으로 이어졌다. 곧이어 나는 김민훈의 조각이 품고 있는, 그의 조각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모종의 미학적 프로그램이 있으며 내게 아름다움의 관념을 불러일으킨 힘은 그것과 관련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봤다. 모든 조각들이 미학적 프로그램에 휘말려 있다는 생각이었다. 경험을 구조화할 정도의 힘이라면 보이는 것보다 강한 무언가가 분명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아름답기보다는 추상적으로 아름다운, 수학적 비율의 이상적 관념을 따랐던 그리스의 예술 작품들처럼 말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나는 다시금 조각을 보고 공간을 걷기 시작했다. 서 있는 조각들은 모두 휴먼 스케일보다 조금씩 더 컸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꼬인 끈이 조각에 문양처럼 덮여 있었으며, 그리 넓지 않은 전시 공간 안에 가상의 격자가 있는 양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처음에 이것들을 보면서 ‘우리’와 닮았지만 우리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외계적인 형상들 같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서 있는 존재들. 이 조각들이 형성하는 큰 격자는, 그보다 낮고 작은 소금 조각들이 이루는 작은 격자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서부터 늘어뜨려진 굵은 밧줄 조각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리듬을 형성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고 다른 재료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하나의 기원에 같은 세계에 속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도대체 누가 이걸 만들었냐.”[1]폴 발레리가 조개껍질에 그려진 나선의 문양을 보고 내뱉은 깊은 고뇌의 말이 나에게서도 일어났다. 작가?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분명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남겨진 것을 보며 가늠할 수 있는 건 그의 존재감뿐이다. 하지만 그 존재감은 진실에의 열망을 자극한다. 혹은 공포스럽거나. 이 조각들의 총합이 환기시키는 것은 이곳 아닌 저곳의 감각이다. 이것들은 확실히, 적어도, 내가 얽힌 현실의 시스템과는 전혀 다른 시스템의 산물이다. 인간이 필연적으로 환상과 가상에 매혹될 수밖에 없듯, 사변을 일으키는 이러한 사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흥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내게 환기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떤 탁월한 수려함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미지의 세계 전체가 불현듯 환기되는 그런 종류의 경외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건 보통 깊은 곳으로부터 이해하지 못할 인공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나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회의 진실을 목격하는 인류학자들이 겪는 경험의 양식이다. 물론 일상에서도 그런 경험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그 경험은 오직 방랑자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여하간, 그러므로 나의 탐구는, 그렇다면 이 조각들과 조각들의 배치를 등장시킨 그 프로그램이라는 것, 아마도 미학적인 것과 관련이 있을 그 프로그램이 무엇일지 밝히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전시장을 나섰다. 이 조각이 가진 미학적 프로그램의 정체는 어떻게 하면 밝혀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질문 자체가 또한 역시나 잊고 있던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적인 예술이란 건 애초에 그런 프로그램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미술이 현대 사회의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묻고 대답하길 노력하는 일은 폭발적으로 증가한 반면 미술의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은 희박하다. 질문을 만들어내는 일 자체가 미술에 대한 질문의 방식이 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엉켜가는 걸 두고 보면서, 나는 언젠가 작가에게 당신의 아름다움의 출처가 무엇인지 물어봐야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름다움에 관한 경험을 품으며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아름다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나날을 보내던 중 나는 문득 김민훈의 작업에서 아름다움의 연유를 밝히는 일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외면하기 힘든 해부학적인 차가움 때문이다. 아직 박동하는 따뜻한 신비를 갈라내 봤자 내가 뭘 얻겠는가. 나는 신비를 이해하기보다는 부풀리는 편이 오히려 더 옳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아름다움은 김민훈의 작업에 있어서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가 아닐까 하는 어쩌면 매우 당연하고 단순한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종종 전시를 상기하며 일상을 보내다가, 문득 김민훈의 작업을 어쩌면 일종의 대지 미술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그런 의구심이 생겨났다. 대지 미술… 전설처럼 전해지지만 언제나 갈망하게 되는 오래되고 먼 이야기. 나는 미술사에서 대지 미술이라고 일컫는 작품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대지 미술 작품은 내가 쉽게 다다르지 못할 땅들 위에 그려지거나 세워지고, 또 그렇게 불리는 많은 것들은 이미 오래전 일어났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순전히 책 덕분이다. 오래되고 광대한 그 작품들은 책을 통해 천천히 멀리 전해지고, 책은 그 오래되고 광대한 것의 모습을 우리에게 내어준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대지 미술에 매혹되고 갈망하게 된 것은 그것에 관한 한 이야기 때문이다. 루시 리파드는 1960년대 뉴욕의 소란스럽고 요란한 현대 미술의 경험 속에서 당대 미술의 비물질화의 경향성을 심도 깊게 다룬 비평가다. 그런 그는 1970년대 후반 현대 미술을 등지고 한적한 영국 남부의 시골로 떠나 지내게 되는데, 그때 등산을 하며 우연히 마주친 고대 문명의 흔적을 통해 불현듯 자신이 겪었던 현대 미술의 의미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2]그렇게 리파드는 『오버레이』에서 고대의 이미지, 조각과 현대 미술의 여러 실천들을 교차시키며 당대의 미술이 오래된 과거의 땅과 물질을 방문하는 이유가 매우 급진적인 정치적 실천으로서 현재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모색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연과 문화가, 물질과 우리가 분리되지 않고 통합 되어있던 세계.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과거의 땅 위에 덧씌워져 있지만 예술가들은 우리의 세계에 과거의 땅을 덧씌워보고자 진력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잊고 잃은 것들, 우리를 파괴하는 것들에 대해 저항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것은 단순히 과거가 현재보다 낫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잊힌 것에 대한 기억의 작업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내게 대지 미술은, 단순히 땅 위에 세워진 조각들을 일컫는게 아니라, 사라지고 잊힌 것을 기억하기 위해 머나먼 땅으로 가면서 시작하는 제의 같은 것에 가깝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대지로 가면, 거기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아득히 멀리서 손짓하는 오래되고 흐릿한 형상의 출몰을 목격할 수 있다. 우리에겐 멀리 있는 텅 빈 땅으로 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거기서 돌을 세우고 나선형의 문양을 그려보고 하염없이 걷는 것은 고대 문명의 실체를 밝혀내거나 소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우리가 무언가를 잊었다는 사실을 되뇌이는 수행이자 무언가가 있었다는 것 정도만을 표현할 수 있을 뿐인 최대한의 노력이다. 현재만을 되풀이하라는 강력한 사회적 압력과 그로부터 되풀이되는 망각에 관해서라면 이러한 일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일이 된다. 내가 리파드의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본 적도 없는 대지 미술을 그리워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미술의 사변적 힘에 대한 염원 때문일 것이다.

“물질 속에는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과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많은 것이 있다.”[3]나는 최근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 읽은 한 문장을 곱씹어보고 있는 중이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정신이 구분된다는 기존의 관념과 달리) 물질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서로 연결된 연속체로 가정하며 그 상호작용에 대해서 탐구하는데, 기억이 이 상호작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기억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지각을 활성화하고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제다. 물질이란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독립적 실재이지만, 우리의 지각과 기억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물질에 관한 베르그송의 저 문장으로 되돌아가 보자. 물질이란 단지 내게 드러나 보여진 것, 내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과하는 실재가 있다. 그런데 그 초과는 아마도 기억의 작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물질의 지각을 넘어서는 초과를 가능하게 하는 기억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 기억의 형태 중 하나가 바로 아름다움이 아닐까 한다.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물질에 대한 감상의 결과가 아니라, 물질 자체를 초과적으로 재구성하는 힘, “현실적으로 주어진” 물질로부터 그 이상을 보게 하는 힘이자 사건이다. 그러면 내가 애초에 김민훈의 작업을 보면서 생각했던 미학적 프로그램이란 것이 기억의 한 형태일까? 여전히 그건 아직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지금은 일단 김민훈의 작업이 아름다움이라는 기억을 통해 우리가 물질을 초과적으로 구성하게끔, 그러니까 물질을 통해 잊히고 사라진 혹은 없는 세계를 상기시켰다는 것만을 생각해도 좋겠다.

김민훈이 작품의 재료로 삼는 흙, 끈, 소금은 모두 그 자체의 물질성보다는 그 물질성과 관련된 보다 광범위한 사변 영역을 위해 쓰였다. 그는 멀고 광대한 땅을 직접 찾진 않았지만 그의 작업은 그와 엇비슷한 가상의 장소를 가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대지 미술이란 아마도 더욱더 이러한 형태를 띨지 모르겠다. 김민훈이 불러온 것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할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이다. 과거 대지 미술이 광활한 자연에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기억을 활성화하려고 했다면, 김민훈이 보여주는 오늘날의 대지 미술은 미시적이고 더 기술적이다. 물질의 세계를 회복하기보다는 물질의 내부에서 세계를 회복하려고 한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에 비해 지금의 예술 실천에서 더 중요해진 것이 물질을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보다 많은”것으로 전환시키는 일이라면, 대지 미술을 어떻게 재발명할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화두가 될 수 있다.


[1] 폴 발레리, 「인간과 조개껍질」, 『인간과 조개껍질: 폴 발레리 비평선-예술론』, 정락길 옮김, 이모션북스, 2021, 123쪽.

[2] “현대 조각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다트무어에서 등산 하고 있을 때, 낮게 솟은 돌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뒤를 돌아보니 그것은 길게 한 줄로 놓인 돌 중 하나였다. 이 돌들은 언덕을 따라 올라가다 능선 꼭대기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이 돌이 거의 4,000년 전에 이 자리에 놓였다는 사실과, 또 연이어 현대미술의 많은 부분이 이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광활히 펼쳐진 주변을 돌아보았다. 개가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몸을 숙여 돌을 만져보았다.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기 힘든 어떤 접촉이 이때 느껴졌다.” 루시 리파드, 『오버레이』, 윤형민 옮김, 현실문화, 2019, 19쪽.

[3]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