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봄으로 눈덩이를 굴리시오!
(망령의 체온 전시 서문)
김민훈
겨울은 무겁고 때론 적막했다. 그건 단순히 기온이 낮아졌다는 것보다는, 세계의 경쾌하고 지독한 소음들이, 내리는 눈, 그 흡음재 아래로 가라앉은 뒤 찾아오는 공허와 같았다. 왜? 버티기 위해 겹겹이 껴입은 털옷 사이로 파고드는 건 한기만이 아니었기에. 내가 가진 삶의 부피가 과연 이 두꺼운 옷가지들만큼이나 견고한 것인지 묻는 질문들이었기에. 내쉬는 숨이 보여지기 위해, 세계는 차갑게 식어 있어야 했다. 하얀 김이 흩어지는 것에서 나는 내가 가진 온기의 흔적을 목격한다.
괜스레 내린 눈을 한 움큼 쥐어 내던져본다. 포슬히 쌓여 시루떡 같은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따가운 차가움에 허벅지에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어렸던 겨울의 기억을 떠올렸다. 눈사람을 만들고자 했고, 방금 눈이 내려 깨끗한 도화지 같은 곳에서 눈을 굴렸다. 아마 무릎 정도 오는 크기였을 텐데, 그것이 비탈길에서 혼자 굴러가는 것아닌가. 나보다 빨랐기에 운전을 할 수가 없었고, 멈춰선 덩어리는 흙과 먼지를 마구 먹어 똥빛이 되었다.
흙과 먼지를 삼킨 것들은 결코 깨끗하지 않지만, 더 무겁고 단단한 실체를 얻는다. 굴러가는 동안 만난 모든 것을 삼켰기에, 그 눈덩이는 나의 의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순수한 흰 눈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무게다. 과연, 불순한 것들은 주변의 수분을 끌어당겨 결정을 더 견고히 만든다고 한다. 듣기를, 눈덩이의 적절한 체온은 영도 0℃ 근처라고, 너무 차가우면 눈 결정이 서로 달라붙지 않는다고, 너무 따뜻하면 곧 형체를 잃고 만다고. 그 아슬한 경계에서만, 자신의 표면을 조금씩 녹여가며 닿는 것들을 끊임없이 끌어안아 성장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적절한 온도를 찾았을 때, 멈춘 것들도 굴러가는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헌 공간과 새 공간을 오가며 짐을 옮길 때, 쌓인 짐들 속에서 몸을 접고 있는 것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다시 손에 쥐기 애매하다는 이유로 밀어둔 것들, 그것들은 버려지기 직전의 상태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머뭇거림, 부끄러움, 수치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작업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내가 멈춘 순간을 더 선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의도에서 미끄러진 뼈들, 살이 다 붙지 못한 채로 굳어버린 피부들, 나는 그 멈춘 것들이 품고 있었을 시간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야만 했다. 적절한 온도를 찾지 못했기에, 녹거나 커지지 않은 것.
‘멈춘 것'들은 용납되지 않는다. 현대의 인프라는 쓸모를 다한 것들을 얼마나 신속하게 격리하는가에 그 성패를 건다. 쓰레기를 문 앞에 두면, 새벽의 마술사가 그것을 감쪽같이 처리한다. 가치는 유동적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어제의 보물은 오늘의 쓰레기가 된다. 위생과 효율이라는 우생학적 잣대는 불순물을 걸러내듯 존재를 격리한다. 그 서늘함 속에 사물도, 기억도, 때로는 우리도 너무 쉽게 ‘버릴 만한 것'이 된다. 추방된 것들의 빈자리에서 안전을 느끼는 찰나의 평화는, 실은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태워낸 뒤에야 허락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차가운 다락방에서 시인은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자신의 원고 뭉치를 태워내 잠시의 온기를 구한다. [1] 미래를 현실에 지불하고, 따뜻한 숨을 사는 그의 고육지책은, 망설임 (혹은 정상-아님)을 밖으로 밀어낸 우리의 사변과 닮지 않았나? 재가 된 원고는 다시 굴릴 수 없다고. 그러나 아직 태워지지 않은 것들, 아직 녹지 않은 것들- 그것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제 온기를 찾으며 더 구를 기회를 희구하고 있다. 멈춰 있는 것과 끝난 것은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믿기로 했다. 똥빛을 우려하여 굴리지도 못한 것들에게 비탈길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부산물, 잔존물, 쓰레기, 부랑아, 무엇으로 부르든 나는 그것에 마음이 걸려 그 앞을 서성였다. 그렇다면 넝마주이가 되어볼까. 망설임을 주워 찬란히 빛을 보게 해볼까. 그런 생각을 품고 동료 작가들에게 무작정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지금을 살면서 마주하는, 혹은 작업을 하며 마주하는 그 망령들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몸을 갈구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 망령의 체온들을 함께 재어보고 싶었다.
동료 작가들을 만나며, 나는 이들이 생각하는 ‘눈덩이’에 대해 들었다. 때로는 말 그대로 작업 과정에서의 부산물이 작업의 중심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마음 어느 한구석을 저당 잡고 있던 불편한 사건들이 노 paddle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 라 보엠 La Boheme 1막. 시인 로돌포는 땔감이 없어 자신이 공들여 쓴 소설과 희곡을 불태워 겨울을 버틴다.
곽지수는 작업을 만들기 위해 오려낸 종이의 남은 부분들을 모아왔다. 큰 비닐봉지에서 그것들을 보여줬을 때, 나는 그것이 일종의 음화 negative print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피사체가 떠난 자리, 그 윤곽만으로 무언가를 짐작하게 만드는 얇은 것들. 웹에서 건진 이미지들이 거대한 몸의 재료로 쓰이고 난 후, 남은 건 대상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위해 기꺼이 밀려난 것들이었다. 그것에 다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허물로서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증인, 그 생각을 하던 유세희는 컨테이너로서 공간들-집과 같은-에 관한, 그리고 그 공간이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지탱하는 인프라 구조들-배선과 같은-에 관한 정치성을 들려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진 것들, 그러니까 맥락이 소거된 채 장식으로 소비되는 타일과 피부 아래를 흐르는 순환의 관들을 패각의 석회질로 본떠 굳혀낸 것은, 컨테이너가 몸에 새긴 증거를 피부 위로 불러오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김문기의 작업실에선 그래픽노블 ‘자두 치킨'의 쪼가리를 보았다. 그 속의 ‘나세르 알리'는 목숨 같던 악기 ‘타르'가 부서지자, 새 악기를 구하는 대신 그냥 누워 죽음을 기다린다. 김문기는 그 타르를 빚었다. 랍스터를, 노를, 톱날을, 직접 염색한 휴지로 빚었다. 그것들은 ‘rag 걸레’로 불렸다. 아끼던 지류함에 산성을 중화한 중성지 보존 상자를 두고 그 안에 흥미를 넣어놓는 선택은,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들을 스스로 결정하는 일처럼 읽혔다. 사용할 페인트부터, 곤충핀까지 상당한 고민을 거친, 소중한 걸레들이었다.
하슬기를 만나러 갔을 때, 난 작업실 바닥 거의 전체를 뒤덮은 반죽을 발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이것들은 완성된 조각이었다가 다시 반죽으로 갈린 후 새로운 얼굴을 하게 된 것이었는데, 서로 다른 출처의 것들이 섞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토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슬기는 끝난 조각은 차갑게 식을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그에게 완성(멈춘 것)은 새 시작을, 그 모든 삶의 가능성을 지시한다. 이 순환이 소멸이 아니라 ‘지층'의 문제라면, ‘던 것’은 곧 ‘되어가는 것'이다. 시간은 비가역적인 것이지만, 그 안의 흔적은 비선형적으로 남고 재편되므로.
우수빈은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 마주하게 되는 뒤구린 기분들을 들려주었다. 허망함, 혹은 반성 따위의 것들. 그것을 정직히 마주하기 위해,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조각의 면, 틈틈이 써온 노트들, 오랜 시간 생각해 온 세계관의 도상들을 인화하여 바닥과 천장을 덮었다. 신성한 신화 대신 비루한 삶의 파편들이 머리 위를 가득 메우는 공간. 방 하나를 일종의 자서전으로 치환하여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로 삼은 것일까? 거울 앞에서, 나는 왜인지 가려져온 무수한 삶을 떠올렸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허수연의 작업실에서 나는 비로소 상술한 모든 생각들을 연결할 수 있었다. 허수연은 불안하고 흔들리는 것들을 회피하지 않았다. 공들여 다져 단단히 굳혀낸 바닥을 일종의 무대로 삼아, 끝내 메워지지 않는 틈들을, 결함과 같은 것들을 고백하듯 그 표면 위에 펼쳐 놓았다. 그러므로 총천연색의 바닥으로부터 일어선 ‘함성'들은,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살아남아 꿈틀대는 줄기찬 존재의 용기와 같은 것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이 모든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벌어진 틈으로 반죽이 차오르고 굳는 그 과정이, 훼손된 자리를 아물게 하는 몸의 생리와 유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곽지수의 음화도, 유세희의 패각도, 김문기의 걸레도, 하슬기의 반죽도, 우수빈의 천장도, 허수연의 바닥도, 결국 같은 몸의 다른 부위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망령의 체온은 규정되지 못한 채로 존재와 부재 사이를 맴도는 흔적들에 정직한 몸을 부여하려는 시도다. 저마다의 사적인 기억에서, 작업의 변두리에서, 사회의 변두리에서 밀려나 끝내 이곳에 남기를 선택한 ‘눈덩이'들은, 애정으로 길러낸 실체로서 이곳에 저마다의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에서, 가려져 있던 내밀한 기억과 흔적들은 불리고-도려내고-덧입혀지는 인고의 시간을 지나 비로소 아물어가는 단단한 표면을 이룬다. 이 축축한 딱지들은, 잔존하는 것들이 자신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해 내뿜는 미세하고도 집요한 체온의 기록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세계는 따뜻해져 개화를 준비하고 있다.
저마다의 마음을 담은 것들을 여기에 가져와 주었다. 굴린 눈덩이에 이들이 아름다운 생각을 덧붙여주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여기에 있다. 이들이 굴려 나갈 미래의 눈덩이에, 사랑과 행복이 깃들기를 바란다.
아마 당신도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서랍 속에, 혹은 기억의 어느 켜 아래에, 끝내지 못하고,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며 아이들의 웃음이 들려오는, 바로 그 봄으로 바로 그 눈덩이를 굴리시오! 제 한 몸 녹여내 세상의 것들을 품는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소란한 생동의 한복판으로, 황소같이 거침없게 투신하시오!
(망령의 체온 전시 서문)
김민훈
겨울은 무겁고 때론 적막했다. 그건 단순히 기온이 낮아졌다는 것보다는, 세계의 경쾌하고 지독한 소음들이, 내리는 눈, 그 흡음재 아래로 가라앉은 뒤 찾아오는 공허와 같았다. 왜? 버티기 위해 겹겹이 껴입은 털옷 사이로 파고드는 건 한기만이 아니었기에. 내가 가진 삶의 부피가 과연 이 두꺼운 옷가지들만큼이나 견고한 것인지 묻는 질문들이었기에. 내쉬는 숨이 보여지기 위해, 세계는 차갑게 식어 있어야 했다. 하얀 김이 흩어지는 것에서 나는 내가 가진 온기의 흔적을 목격한다.
괜스레 내린 눈을 한 움큼 쥐어 내던져본다. 포슬히 쌓여 시루떡 같은 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따가운 차가움에 허벅지에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어렸던 겨울의 기억을 떠올렸다. 눈사람을 만들고자 했고, 방금 눈이 내려 깨끗한 도화지 같은 곳에서 눈을 굴렸다. 아마 무릎 정도 오는 크기였을 텐데, 그것이 비탈길에서 혼자 굴러가는 것아닌가. 나보다 빨랐기에 운전을 할 수가 없었고, 멈춰선 덩어리는 흙과 먼지를 마구 먹어 똥빛이 되었다.
흙과 먼지를 삼킨 것들은 결코 깨끗하지 않지만, 더 무겁고 단단한 실체를 얻는다. 굴러가는 동안 만난 모든 것을 삼켰기에, 그 눈덩이는 나의 의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건 순수한 흰 눈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무게다. 과연, 불순한 것들은 주변의 수분을 끌어당겨 결정을 더 견고히 만든다고 한다. 듣기를, 눈덩이의 적절한 체온은 영도 0℃ 근처라고, 너무 차가우면 눈 결정이 서로 달라붙지 않는다고, 너무 따뜻하면 곧 형체를 잃고 만다고. 그 아슬한 경계에서만, 자신의 표면을 조금씩 녹여가며 닿는 것들을 끊임없이 끌어안아 성장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적절한 온도를 찾았을 때, 멈춘 것들도 굴러가는 무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헌 공간과 새 공간을 오가며 짐을 옮길 때, 쌓인 짐들 속에서 몸을 접고 있는 것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다시 손에 쥐기 애매하다는 이유로 밀어둔 것들, 그것들은 버려지기 직전의 상태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에 대해 머뭇거림, 부끄러움, 수치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작업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내가 멈춘 순간을 더 선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의도에서 미끄러진 뼈들, 살이 다 붙지 못한 채로 굳어버린 피부들, 나는 그 멈춘 것들이 품고 있었을 시간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야만 했다. 적절한 온도를 찾지 못했기에, 녹거나 커지지 않은 것.
‘멈춘 것'들은 용납되지 않는다. 현대의 인프라는 쓸모를 다한 것들을 얼마나 신속하게 격리하는가에 그 성패를 건다. 쓰레기를 문 앞에 두면, 새벽의 마술사가 그것을 감쪽같이 처리한다. 가치는 유동적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어제의 보물은 오늘의 쓰레기가 된다. 위생과 효율이라는 우생학적 잣대는 불순물을 걸러내듯 존재를 격리한다. 그 서늘함 속에 사물도, 기억도, 때로는 우리도 너무 쉽게 ‘버릴 만한 것'이 된다. 추방된 것들의 빈자리에서 안전을 느끼는 찰나의 평화는, 실은 누군가의 소중한 것을 태워낸 뒤에야 허락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차가운 다락방에서 시인은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자신의 원고 뭉치를 태워내 잠시의 온기를 구한다. [1] 미래를 현실에 지불하고, 따뜻한 숨을 사는 그의 고육지책은, 망설임 (혹은 정상-아님)을 밖으로 밀어낸 우리의 사변과 닮지 않았나? 재가 된 원고는 다시 굴릴 수 없다고. 그러나 아직 태워지지 않은 것들, 아직 녹지 않은 것들- 그것들은 여전히 어딘가에서 제 온기를 찾으며 더 구를 기회를 희구하고 있다. 멈춰 있는 것과 끝난 것은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믿기로 했다. 똥빛을 우려하여 굴리지도 못한 것들에게 비탈길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부산물, 잔존물, 쓰레기, 부랑아, 무엇으로 부르든 나는 그것에 마음이 걸려 그 앞을 서성였다. 그렇다면 넝마주이가 되어볼까. 망설임을 주워 찬란히 빛을 보게 해볼까. 그런 생각을 품고 동료 작가들에게 무작정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지금을 살면서 마주하는, 혹은 작업을 하며 마주하는 그 망령들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몸을 갈구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 망령의 체온들을 함께 재어보고 싶었다.
동료 작가들을 만나며, 나는 이들이 생각하는 ‘눈덩이’에 대해 들었다. 때로는 말 그대로 작업 과정에서의 부산물이 작업의 중심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마음 어느 한구석을 저당 잡고 있던 불편한 사건들이 노 paddle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1] 라 보엠 La Boheme 1막. 시인 로돌포는 땔감이 없어 자신이 공들여 쓴 소설과 희곡을 불태워 겨울을 버틴다.
곽지수는 작업을 만들기 위해 오려낸 종이의 남은 부분들을 모아왔다. 큰 비닐봉지에서 그것들을 보여줬을 때, 나는 그것이 일종의 음화 negative print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피사체가 떠난 자리, 그 윤곽만으로 무언가를 짐작하게 만드는 얇은 것들. 웹에서 건진 이미지들이 거대한 몸의 재료로 쓰이고 난 후, 남은 건 대상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위해 기꺼이 밀려난 것들이었다. 그것에 다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허물로서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증인, 그 생각을 하던 유세희는 컨테이너로서 공간들-집과 같은-에 관한, 그리고 그 공간이 살아 숨쉴 수 있도록 지탱하는 인프라 구조들-배선과 같은-에 관한 정치성을 들려주었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진 것들, 그러니까 맥락이 소거된 채 장식으로 소비되는 타일과 피부 아래를 흐르는 순환의 관들을 패각의 석회질로 본떠 굳혀낸 것은, 컨테이너가 몸에 새긴 증거를 피부 위로 불러오는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김문기의 작업실에선 그래픽노블 ‘자두 치킨'의 쪼가리를 보았다. 그 속의 ‘나세르 알리'는 목숨 같던 악기 ‘타르'가 부서지자, 새 악기를 구하는 대신 그냥 누워 죽음을 기다린다. 김문기는 그 타르를 빚었다. 랍스터를, 노를, 톱날을, 직접 염색한 휴지로 빚었다. 그것들은 ‘rag 걸레’로 불렸다. 아끼던 지류함에 산성을 중화한 중성지 보존 상자를 두고 그 안에 흥미를 넣어놓는 선택은,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들을 스스로 결정하는 일처럼 읽혔다. 사용할 페인트부터, 곤충핀까지 상당한 고민을 거친, 소중한 걸레들이었다.
하슬기를 만나러 갔을 때, 난 작업실 바닥 거의 전체를 뒤덮은 반죽을 발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이것들은 완성된 조각이었다가 다시 반죽으로 갈린 후 새로운 얼굴을 하게 된 것이었는데, 서로 다른 출처의 것들이 섞였다는 점에서 일종의 토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슬기는 끝난 조각은 차갑게 식을 것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그에게 완성(멈춘 것)은 새 시작을, 그 모든 삶의 가능성을 지시한다. 이 순환이 소멸이 아니라 ‘지층'의 문제라면, ‘던 것’은 곧 ‘되어가는 것'이다. 시간은 비가역적인 것이지만, 그 안의 흔적은 비선형적으로 남고 재편되므로.
우수빈은 자신이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 마주하게 되는 뒤구린 기분들을 들려주었다. 허망함, 혹은 반성 따위의 것들. 그것을 정직히 마주하기 위해, 오직 자신만이 볼 수 있었던 조각의 면, 틈틈이 써온 노트들, 오랜 시간 생각해 온 세계관의 도상들을 인화하여 바닥과 천장을 덮었다. 신성한 신화 대신 비루한 삶의 파편들이 머리 위를 가득 메우는 공간. 방 하나를 일종의 자서전으로 치환하여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로 삼은 것일까? 거울 앞에서, 나는 왜인지 가려져온 무수한 삶을 떠올렸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허수연의 작업실에서 나는 비로소 상술한 모든 생각들을 연결할 수 있었다. 허수연은 불안하고 흔들리는 것들을 회피하지 않았다. 공들여 다져 단단히 굳혀낸 바닥을 일종의 무대로 삼아, 끝내 메워지지 않는 틈들을, 결함과 같은 것들을 고백하듯 그 표면 위에 펼쳐 놓았다. 그러므로 총천연색의 바닥으로부터 일어선 ‘함성'들은,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니라 살아남아 꿈틀대는 줄기찬 존재의 용기와 같은 것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이 모든 것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벌어진 틈으로 반죽이 차오르고 굳는 그 과정이, 훼손된 자리를 아물게 하는 몸의 생리와 유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곽지수의 음화도, 유세희의 패각도, 김문기의 걸레도, 하슬기의 반죽도, 우수빈의 천장도, 허수연의 바닥도, 결국 같은 몸의 다른 부위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망령의 체온은 규정되지 못한 채로 존재와 부재 사이를 맴도는 흔적들에 정직한 몸을 부여하려는 시도다. 저마다의 사적인 기억에서, 작업의 변두리에서, 사회의 변두리에서 밀려나 끝내 이곳에 남기를 선택한 ‘눈덩이'들은, 애정으로 길러낸 실체로서 이곳에 저마다의 위치를 차지한다. 여기에서, 가려져 있던 내밀한 기억과 흔적들은 불리고-도려내고-덧입혀지는 인고의 시간을 지나 비로소 아물어가는 단단한 표면을 이룬다. 이 축축한 딱지들은, 잔존하는 것들이 자신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해 내뿜는 미세하고도 집요한 체온의 기록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세계는 따뜻해져 개화를 준비하고 있다.
저마다의 마음을 담은 것들을 여기에 가져와 주었다. 굴린 눈덩이에 이들이 아름다운 생각을 덧붙여주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여기에 있다. 이들이 굴려 나갈 미래의 눈덩이에, 사랑과 행복이 깃들기를 바란다.
아마 당신도 그런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서랍 속에, 혹은 기억의 어느 켜 아래에, 끝내지 못하고,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며 아이들의 웃음이 들려오는, 바로 그 봄으로 바로 그 눈덩이를 굴리시오! 제 한 몸 녹여내 세상의 것들을 품는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소란한 생동의 한복판으로, 황소같이 거침없게 투신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