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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신교환: 흙, 밧줄, 소금
          Correspondence: Earth, Rope, Salt


          김민훈 & QF(하상현)

         
2024년 7월 9일
민훈→상현

안녕하세요, 상현 님. 저는 지금 라스베가스 부근을 여행하고 있어요.

고대 암각화를 보러 간다고 들떠 자랑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 드디어 불의 협곡(Valley of Fire)에서 보고 왔어요. 암각화를 보기 위해선 거대한 암석을 따라 난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야 했습니다. 계단 아래에 야생 큰뿔양 무리가 쉬고 있어서 긴장되었네요. 바위에는 크고 작은 사람과 동물들, 나선형의 문양들과 도구처럼 보이는 것들이 꽤 큰 규모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계단을 밟고 편하게 그 앞에 다다랐지만, 이 그림을 새긴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 그림을 새겼을까요? 대단한 노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지역의 암석은 선명한 붉은 색상을 띠고 있습니다. 철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 붉게 산화된 것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암석과 지표면의 일부는 검게 변색되어 있습니다. 이건 사막 바니쉬(Desert varnish)라는 현상이라고 하더라고요. 사막의 건조한 기후에서 암석의 표면에 점토와 산화철, 망간이 오랜 시간 축적되어 형성되는 검은 막이라고 합니다. 암각화는 이 각질을 벗겨내어 새겨졌습니다.

그림 얘기를 조금 더 해볼까요? 아래쪽부터, 한쪽 다리가 지나치게 과장된 사람이 만세를 하고 있고, 그 위에 뿔이 달린 사람이 망토를 두르고 나무 옆에 서있습니다. 그 위엔 큰뿔양 세 마리가 좌측을 바라보며 서 있고, 옆에는 큰 십자 무늬가 있습니다. 선두의 산양 허리춤에서 사다리가 시작되는데, 오르는 길을 따라 커다란 손바닥과 구불구불한 선들과 만세하고 있는 사람 두 명이 있습니다. 사다리가 끝난 부분에는 막대를 들고 만세 하는 사람이 있고, 수평 선들이 위로 층층이 쌓여 있어요.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제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 멀리 펼쳐진 땅과 하늘의 경계를 내려다보며 계단을 타고 내려오니 수컷 큰뿔양 한 마리가 작은 미동도 없이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언가를 올려다보고(admiring), 내려다보고(condescending), 마주보는(facing) 자세와 상황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땅 위에서 바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에는 경외와 존경이 스몄습니다. 종종 우리의 능력이나 이해를 넘어서는 것을 자연스럽게 올려다보게 되지 않나요? 혹은 히말라야 산봉우리로의 면면한 행렬, 최고의 마천루를 위한 각고의 노력들. 가끔은 이런 사건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고양되는 것만 같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을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계단을 올라 땅을 내려다볼 때엔, 거대한 사막의 지평선과 바위골을 타고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마음을 보이지 않는 저 너머까지 늘리는 듯 했습니다. 거대한 존재가 된 것만 같기도 했고요. 높은 산과 빌딩에 올라 거대한 땅을 내려다볼 때, 어떤 것을 느끼나요? 종종 자만함과 연관되기도 하는 이 시선은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어주지 않기 때문에 홀로, 고립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제 수천 년 전 새겨진 그림을 마주 봅니다.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지 않고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앞에 있는 것이 어디로 튀어나갈 지 모르겠다는 예측 불가의 긴장감도 느껴지지만, 동시에 신뢰의 싹이 움트기도 합니다. 가령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눈동자를 바라볼 때 서로는연결되지 않나요? 눈과 눈 사이 어느 한 허공에서 감정과 생각이 부대끼고, 머지않아 정이 발아합니다.

저는 암각화 앞에서 분명 무언가와 연결되었습니다. 그건 제가 사용할 수 있는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에 위안과 동력이 되었습니다. 계단 아래의 수컷 큰뿔양은 제가 이곳을 떠나기까지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작은 뿔이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 잘 지내. 이것이 오늘 제가 느낀 감각입니다.


2024년 8월 13일
상현→민훈

안녕하세요, 민훈 작가님. 보내 주신 첫 편지를 받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네요. 오랫동안 답신을 하지 못했죠. 편지를 어떤 말로 시작할지 고민하느라 글을 쓰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어쩌면 이건 제가 마지막에 주고받을 세 번째 편지를 너무 앞서 예상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까지 큰 우울증을 겪었어요. 삶에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소중한 것들과 감각들이 놀라울 정도로 모두 사라졌습니다. 미래의 가능성은 닫히고, 과거를 왜곡하면서, 지금 흐르는 시간을, 흐르지 못하도록 잡고 있었습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영어로는 ‘Seize the day’라는 오래된 경구가 있죠. 현재를 조금은 고집스럽게 손에 움켜쥐고, 축축하게 만지는 일, 그걸 하면 좋겠습니다. 손에 쥐고 있지만 동시에 흐를 수 있도록 말이에요.

지난 편지에서 작가님은 무언가를 올려다보고(admiring), 내려다보고(condescending), 마주 보는(facing) 상황에 관해 이야기하셨죠. 암각화와 수컷 큰뿔양 앞에서 몸과 마음이 커진 경험도 이야기했어요. 병으로 방에서 움직이지 못할 때 이 편지를 받았고, 세계를 향해 열린 작가님이 부러웠습니다.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고, 마주 보는 일은 어쨌든 자신의 방으로부터 한 걸음을 내디뎌, 광장으로, 밖으로 나가 대상을 마주하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방 안에 누워 있는, 서 있지 못한 몸을 생각했어요. 아픈 몸의 시선은 어디로도 향하지 못하고 내부로, 잠의 세계로 침잠합니다. 이때 잠깐 실눈을 뜰 수 있다면, 천장이나 벽을 보게 될 겁니다. 이를 ‘마주 보는’ 일과 비교해 볼 수 있겠지만, 이는 외부의 대상인 천장, 벽과 연결되는 일이 아니라, 거울을 바라보듯 자신을 반사해 비춰보는 일, 혹은 아무 의미도 없는 텅 빈 허공을 바라보는 일에 가깝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방에 들어온다면, 나는 그를 사선으로 힘없이 흘깃 바라볼 것입니다. 이는 ‘올려다보는’ 일에 가깝지만, 여기에는 작가님이 말하신 경외심과 존경보다는 위압감과 의기소침함, 부러움이 시선에 담길 것입니다. 저번 편지를 통해 작가님이 그렇게 아픈 제 방에 들어왔었네요.

수컷 큰뿔양이 미동도 없이 당신을 바라본 경험을 이야기해 볼까요. 최근에만난 어떤 작가는 천 마리의 사슴이 살고 있는 안마도라는 섬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섬은 사람보다 사슴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섬이에요.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귀여운 대상으로 동물을 바라보거나, 미디어에서 안전한 방식으로 길들여진 이미지를 통해 동물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둔 시스템 안에서, 촘촘히 정렬된 그리드-스크린-우리를 통해 동물을 바라봅니다. 야생에서 동물을 바라보는 경험,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다수의 육신, 그 타자적 존재를 바라보는 일은, 더 이상 인간이 동물을 위에서 아래로 관망하는 시선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는 또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처럼, “감정과 생각이 부대끼고 정이 발아하는일”만도 아닐 겁니다. 이 마주함(facing)은 언제든 나를 덮칠 수 있고, 죽일 수 있는 몸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그것들을 마주하는 일은 화합뿐 아니라, 불화와 어긋남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올려다보는’ 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고 첫 편지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작가님은 2022년 〈YOU +〉를 제작할 때 대들보로 사용하던 버려진 소나무를 가져왔습니다. 그때 수평으로 사용해 온 대들보를 수직으로 세우며, 2m 80cm 가량의 나무를 올려다본 경험을 이야기해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자신보다 큰 대상을 바라 보는 일에 매혹되는 작가님을 보며, 이러한 욕망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바로 다음 해에 제작한 〈신부〉도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높이를 가지고 있었죠. 작가님이 조각에서의 ‘높이’와 ‘올려다보는 경험’을 앞으로 어떻게 다루실지 궁금합니다. 〈신부〉에서 가장 바깥에 드러난 표면은 밧줄을 전통 매듭법으로 묶어 제작되었습니다. 밧줄은 중력에 따라 아래로 늘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죠. 최근에 천속에 들어가 이미지가 가려진 몸들과 그들의 내밀한 접촉을 실험한 작가의 퍼포먼스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천은 덩어리질 수 있고, 또 바닥에 붙어 납작해질 수도 있다는 걸 이때야 제대로 알게 됐어요. 천이 높이 세워지는 경우에도 재료가 직접 중력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받아들이고 아래로 떨어지며, 이와 동시에 표면을 바꾼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번 개인전에서 제작하고 있는 신작은 이런 밧줄의 늘어짐이 중요해 보이네요. 어떻게 만드실지 궁금합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답신 기다릴게요.


2024년 8월 25일
민훈→상현

안녕하세요, 상현 님. 저는 지금 일산의 작업실입니다. 겪으신 일이 과거형으로 쓰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배운 방법 하나를 알려드리고 싶어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뱉기를 반복합니다. 호흡을 할 때마다 스스로의 몸이 커진다고 상상해 보세요. 풍선처럼요. 어느덧 내 몸이 엄청나게 커다랗게 되었을 때, 눈을 감고 손바닥을 바라봅니다. 손바닥에는 지금 나를 잡은 문제와 감정들이 올려져 있습니다. 내려다보며 웃습니다. 가능하면 소리 내어 웃으라고 했는데, 저는 그냥 미소를 지어요. 이제 다시 호흡하며, 스스로의 몸으로 돌아옵니다. 제가 스스로 보살피고 싶을 때 가끔 하는 일입니다.

맞아요. 대들보 기둥을 올려다봤었죠. 그리고 그게 저한테 뭔가 전달하는 것만 같았다고 했던 기억이 나요. 끌을 대고 오랫동안 망치질을 해서 구불거리는 모양을 만들었는데, 저에게 그건 나름의 최선으로 말을 건 것과 함께 하는 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이 있었을 머리 위의 높은 곳에 올려두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몸이 지나다닐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문으로서 보이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 참여했던 전시에서는, 그 높이가 허리춤으로 내려와, 통로를 막는, 즉 움직임을 제한하는 바리케이드가 되기도 했었네요. 공간과 시선의 방향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두 상황 모두를 오래 바라볼 수 있었으니, 개방이자 동시에 폐쇄가 되는 시선과 높이의 결탁에 대해 자연스럽게 닿았습니다.

무언가를 올려다보는 행위는, 때로는 목 뒤에 주름이 접히는 불편한 상태를 유발합니다. 적어도 제 몸에서는요. 저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도, 무언가를 오래 올려다보면 두통을 느끼곤 했습니다. 아마도 유전적인 소인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십여 년 전,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찰흙으로 인물의 얼굴을 빚을 때도 그랬습니다. 선생님들로부터 아래에서 두상을 바라보며 코를 기준으로 양쪽 얼굴의 깊이 대칭을 맞춰야 한다고 배웠고, 정말 그 방식이가장 정확한 판단을 하게 해 줬어요. 무릎을 굽혀 찰흙덩어리를 올려다보면, 정면에서 보지 못한 왜곡, 얼굴 속에서 깊이의 불균형을 찾을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내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저는 내려다보는 일을 더 선호하게 되었어요. 얼굴 덩어리를 내려다볼 때도 올려다본 것처럼 고쳐야 할 부분들을 직시할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보면 턱 부분이 가려져 대칭을 맞추기가 어려웠습니다. 올려다보는 것은 몸이 불편하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이었네요. 그렇게 정면에서, 아래에서, 위에서 바라보며 하나의 얼굴을 빚었어요. 하나의 시점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 될 수 없겠다는 것이 최근의 제 생각입니다.

지난 제 개인전 《네 기둥》을 위한 글에서, 상현님이 ‘같은 방법으로 조각하기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유일한 기원이 아닌,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에로틱한 반복을 수행하는 일’이라 하셨던 말이 떠오릅니다. 이전에 만들었던 조각을 반복하는 일은 조각이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세계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더 돌아보는 의식적인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반복의 행위를 단지 형식적이거나 물리적인 작업을 넘어선 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신체의 스케일을 넘어서는 기둥을 세우는 것이 언제나 가능할까요? 어쩌면 그 기둥은 처음부터 무너질 운명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세우려 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잖아요. 종종 그 기둥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떠올리며 작업을 합니다. 무너짐은 실패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차원의 창조를 의미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학부 시절 열었던 《GRABO》 전시의 조각과 폐기물을 모아 다시 다른 조각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를 만든 것처럼요.

《네 기둥》은 우리를 받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조각적인 언급이었어요. 철도에 누워 인간와 물자의 이송을 돕던 것, 오랜 정념이 깃든 것, 전시의 상황을 구성하는 것, 팔다리가 마구 떨어져 나온 것들로 기둥적인(꼭 수직적이지만은 않은) 것을 만들었죠. 그때 우리의 대화* 속에서 등장한 ‘이미 직립한 것’과, ‘행위를 통해서 기립시킬 수 있는 것’은 수동성의 체험과 능동성의 체험에서 떨어져 나온 말이었어요. 그런데요. 제가 세워 올린 기둥들은, 기립하는, 즉 능동적인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은 이것은 무엇보다도 수동적인 것은 아니었을지요. 몸에 각인된 어떤 것들-제가 알고 있는 정보를 월등히 넘어선 어떤 것들-이 발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저는 그저 그것을 매개한 것이 아닐지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계곡 근처에서 조약돌을 쌓아 올렸던 기억도 떠오르네요. 무언가를 쌓아 올리려는 것은 염원의 본능, 즉 그 자체로 하나의 의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때로 폭력적 혹은 권력적으로, 누군가를 타자화하며 작동하기도 하는 바로 그것이요.

* “작가는 무엇을 세우기 위해서라기보단, 세워진 것에 접촉하고 뒤틀기 위해서 이 과정을 수행한다. 이때 기둥은 이미 직립한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천천히 기립시킬 수 있는 것으로, 우리가 안마할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네 기둥》서문, QF(하상현)

넓적한 발로 땅을 두드려 빗소리를 흉내 내는 새들, 비 오는 소리를 느끼고 땅 위로 올라오기로 결심한 지렁이들, 이어지는 새의 만족스러운 포식.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들은 살기 위해 다른 것이 만드는 신호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신호는 때로 속임수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큰뿔양과의 만남을 의중을 모르는 무언가와의 조우라고 말씀하신 것이 흥미롭습니다. 화합뿐만 아니라 불화와 어긋남의 위험을 감수하는 길. 의중을 알 수 없는 무언가는, 때론 생명체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장항 지역에서는, 구리 제련 공장의 비산 먼지가 빗물을 타고 흙에 스며들어, 그 흙 위에 사는 사람들을 아프게,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땅에 매립된 채 잊힌 화학 물질에게 공격당한 러브 커낼 지역의 사람들도 떠올랐어요.

토마토는 과일인가요, 채소인가요? 어떤 답을 떠올렸어요? 환경사회학을 접하며 일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우선, 토마토는 식물학적으로 과일로 분류됩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것을 과일로 여기는 것이 왜인지 탐탁지 않습니다. 토마토를 수입한 미국의 닉스 일가는, 토마토에 세금을 부과한 세관원 헤이든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습니다. 요는, 과일에는 세금이 안 붙고 야채에는 세금이 붙는데, 왜 토마토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미국의 대법원은 토마토를 채소로 분류하며 헤이든의 손을 들었습니다. 이유는, 우리는 토마토를 다른 과일처럼 후식으로 먹지 않고, 컬리플라워나 양배추처럼 주식의 재료로 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에 기반한 생물학적 분류는 이 상황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전의 정의는 증거가 될 수 없고, 법원의 기억과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만 인정된다.’ 토마토의 정의에관세의 맥락이 끼어들었고, 대법원의 판결로 개인은 그곳에서 일탈할 수 없게 되었어요. 생물의 분류 정의 체계와 같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내용은 매우 견고하고, 빈 틈이 없어 보이지만, 실은 매우 가변적이고 정치와 같은 압력 속에서 쉽게 탈화하는 것입니다. 알고 있는 사실이 얼마나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인지요?

나뭇등걸은 이런 시간 속 저에게 남겨진, 근원을 알 수 없는 찝찝함에서 출발했습니다. 공부해야 하는 것들이었으니까요. 지금껏 작업을 하며 많은 것을 만져볼 수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 하중을 견딘 흔적이 표면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침목, 매끈하고 투명한 창구용 폴리카보네이트 판, 축축하다 금세 굳어버리는 석회반죽,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던 대들보, 가지치기로 잘려 나온 나뭇가지들, 그것들과 제가 포옹하며 배설한 조각이 있다는 사실, 이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그 접촉의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것들과 진득이 함께 하는 것이 지금 제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현 님, 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세 방향의 선을 그려보기로, 그리고 이에 대한 조각적인 언급을 반복해 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것(흙)을 마주 보고,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밧줄)를 올려다보고, 우리가 추출한 것(소금)을 내려다보기로요. 이 세 가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걷는 방향이 상현 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좀 궁금하기도 하고요. 여하튼... 저는 좀 산만한 사람 같네요.

구월이 다가오는데 여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모쪼록 건강하세요.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나 반가웠습니다.


2024년 9월 6일
상현→민훈

안녕하세요. 민훈 작가님. 저희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 받을수록 글이 길어지고 있네요. 점점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지나 봅니다. 약속한 세 번째 편지가 끝나면 아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보내주신 편지의 마지막부터 거꾸로 올라가 볼까 해요.

작가님은 편지 말미에 “우리가 딛고 서 있는 것(흙)을 마주 보고,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밧줄)를 올려다보고, 우리가 추출한 것(소금)을 내려다보고 싶다” 했어요. 재미있던 점은 어떤 기준으로 ‘딛고 서 있는 것’, ‘사용하는 도구’, 그리고 ‘추출한 것’을 각각 ‘마주 보고’,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기’로 결정했을까하는 부분이에요. 왜 흙을 (내려다보지 않고) 마주 보기로 결정한 걸까, 또는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를 (잡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올려다보는 일은 어떤 보기를 향하는 걸까. 이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흙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실 모든 ‘살’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인간과 동식물의 사체, 모든 죽은 것들은 중력의 힘을 받으며 스러져, 지면 아래로 점점 축적되어 갑니다. 지층은 이런 ‘곧 죽을 살아 있는 것들’과 ‘이미 죽은 것들’의 시간이 쌓이고, 관계 맺고 있는 어떤 집합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각을 만들 때, 또 그것을 전시할 때, 우리는 ‘바닥’과 어떻게 관계하고 있나요. 어떤 대상이 중력에 대항해서 설 수 있는 것은 흔히 그 대상의 능력, 혹은 귀속된 속성처럼 여겨지집니다. 하지만 서는 일은 사실상 바닥과 지면과의 관계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작가와 큐레이터마다 바닥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바닥에 특수한 에폭시 마감처리를 해서 약간의 손상도 소스라치게 두려워하는 공간 운영자, 바닥의 상태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큐레이터, 계약서까지 쓴 공간 일정을 바닥 색 하나 때문에 되돌리려고 했던 작가 등. 여러 사람과 상황들이 떠오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희가 d/p에서 전시를 했을 때 함께 바닥을 닦았던 시간이 기억에 남습니다. 바닥을 닦으면 닦을수록 조각의 형과 색이 점점 드러나는 것을 보았을 때, 누군가는 어리석다 볼 수 있겠지만 바보처럼 몇 시간이고 바닥을 닦을 수밖에 없었지요. 저는 그게(‘닦기’가) 큐레이터가 할 수 있는일종의 제작 행위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딛는 행위’는 딛는 것과 딛어지는 것, 두 대상 사이를 즉각적으로 관계 맺게 합니다. 마치 그 관계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말이에요. 특히 딛는 주체는 더욱더 그 사실을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딛는 순간 그것은자연스러운 환경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지금도 저는 글을 쓰며 카페에서 어떤 의자를 딛고 있습니다. 또 노트북은 책상을, 책상은 바닥을 딛고 있죠.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너무도 ‘즉각적’이고 ‘자연스러워’서 인지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다른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딛어지는’ 존재가 될 때는 어떨까? 누군가를 받치기 위해서 더 많은 중력을 감당해야 하는 경우 말입니다. 학창 시절에 ‘햄버거 놀이’를 한 적이 있는데, 세대가 조금 달라 아실까요? 한 명 위에 다른 한 명이 올라가고, 그 위에 또 다른 한 명, 그 위에 또 다른 한 명이… 그래서 누군가가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아랫사람을 깔아 눕히는 놀이입니다. 저는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자꾸 이걸 저한테 해서, 괴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친구들이 저를 싫어하는 줄 알고 왕따가 된 줄 알았죠. 돌이켜보면 사실 그냥 저랑 놀고 싶었던 것 같은데요.

아무튼, 우리가 딛고 있는 대상을 마주 보기로 한 작가님의 결정은 어쩌면, 햄버거 놀이에서 가장 밑에 깔린 아이와 눈을 맞추는 섬뜩한 순간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깔린 아이는, 바닥은, 지면은, 좌대는, 흙과 땅은, 우리가 애써 감춰 왔던 눈을 깜박이며 우리를 지켜보겠죠. 어쩌면 작가님이 마주했던 큰뿔양의 두 눈도 그런 눈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음으로, 도구(밧줄)를 올려다보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요. 작가님의 말을 들었을 때,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바라보는 것 사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낸 오래된 사상가가 떠올랐습니다. 그에 따르면 ‘도구를 사용하는 일(ready to hand)’과 ‘도구를 바라보고 마주하는 일(present at hand)’은 다르다고 해요. 우리가 망치를 들고 사용할 때 그 망치는 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이때 망치는 ‘못을 박는 망치의 쓸모’를 따르는 일련의 과정 안에서 우리의 몸과 자연스럽게 연동돼 움직이죠. 이는 힘이 비대칭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일련의 방식이 이미 정해진 하나의 체계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에서, 또 그 조직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계적입니다. 반면 우리가 도구를 바라볼 때(그 사상가의 예시로는 ‘망치가 망가졌을 때’) 우리는 그 도구를 특정한 속성을 가진 대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물론 사용하지 않는 망치를 눈앞에서 보더라도 그 망치가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망치는 언제나 인간, 혹은 또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망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앞서 말한 사상가는 기술 철학자이기도 한 하이데거인데요. 그의 도구론을 읽으면서 발견한 신기한 부분이 있어서 공유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이데거의 용어 중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보통 한국어로 ‘손-안에-있음(ready-to- hand)’으로 번역됩니다. 또 ‘망가진 도구를 눈앞에 두고 보는 상황’은 ‘눈-앞에- 있음(present-at-hand)’로 번역돼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present-at- hand’의 좀 더 정확한 번역어는 ‘손-(지점)에-있음’에 가깝지 않을까요? 학자들 사이에서 어떤 연유가 있겠지만, 일반인인 제가 봤을 땐 좀 이상한 번역입니다. 만약 우리가 ‘손-에-있음’이라는 번역을 채택해 볼 수 있다면, 망치가 망가진 순간에도 망치가 여전히 손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상기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이런 상황이 ‘눈’으로만 보는 일이 아니라, 여전히 ‘손’으로 사물의 현시와 관계하는 일이라는 사실도 말입니다.

보다 최근 사상가인 사라 아메드는 저서 『퀴어현상학 Queer Phenomenology』에서 도구인 망치가 깨진 상황을 ‘present-to-hand’라는 용어로 전개했습니다. 이는 present-at-hand라는 표현이 망치의 속성을 마치 독립적인 것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나온 것입니다. 깨진 망치는 물론,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순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라, ‘손’ 그것도 그 망치를 제작하게 한,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과거의 모든 여러 ‘손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이처럼 아메드는 몸과 사물이 근접하는 관계를 통해 망치의 속성이 부여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나아가 그는 우리가 어떤 몸(-사물)을 우리에게 근접하도록 허용하고, 또 다른 어떤 몸(-사물)은 멀리하고 눈에 보이지 않게 밀어내는지를 질문합니다. 아메드의 『퀴어현상학』은 철학의 ‘지향성(Orientation) 개념’을, 퀴어의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과 관계시키는 흥미로운 글이니 언제 한번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밧줄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작가님의 표현에서 도구(밧줄)를 올려다보는 상황은 어떤 것을 의미하나요? 이는 단순히 밧줄을 도구로 사용하는 상황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작가님은 밧줄을 몸과 분리된 독립된 개체로 대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건 올려다보는 일이 말 그대로 ‘눈’으로만 보는 상황을 가정하시는 걸까요? 지난 편지에서 작가님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일’을 마주 봄의 예시로 들었죠. 저에겐 다분히 아브라모비치의 〈Artist is Present〉(2004)라는 작업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의 작업이 몸의 ‘현시(present)’를 말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온갖 ‘매개들(mediums)’을 드러나게 한 것처럼, 거리를 두고 마주 보는 상황은 단순히 그 순간의 사건만을 뜻하지 않고, 그 두 대상이 지나온 역사, 그리고 현재에 그것을 감각하게 하는 온갖 매개를 끌고 들어오는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추가로 도구를 마주 보는 것을 넘어 ‘올려다보는’ 일이 무엇일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작가님에게 밧줄은 다른 대상을 조형하는 도구나 장식인지, 아니면 마주 보는 대상인지, 아니면 우리의 능력과 이해를 넘어선 무언가에 존경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사물인지요? “하나의 시점은 그 자체로 충분한 것이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을 봤을 때, 중요한 것은 올려다보고, 마주 보고, 또 내려다보는 것을 전환하는 경험 자체라는 생각도 드네요.

마지막으로, 추출한 소금을 내려다보는 일은 무얼 뜻할까요? 여기서 추출에 관해서는 떠오르는 생각이 별로 없네요. 추출은 물질을 분리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이라는 것 정도만 생각납니다. 하지만 ‘내려다보는 일’에 관해선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퍼포먼스와 공연예술 작업에서 관객은 보통 퍼포머와 무대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공간 전체를 쓰는 경우에도 관객과 퍼포머가 같은 지면에 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다르게 관람 대상을 내려다보게 하는 형식의 작업이 몇 가지 떠오르네요. 검은색 자갈과 시체같이 누운 몸을 쓰레기 더미처럼 옮기는 행위를 극장 위에 테라스에서 내려다보게 한 이신후 작가의 〈훔친 개, 훔친 아기〉(2023), 인공해변에서 펼쳐지는 누워있는 사람들의 오페라를 내려다보게 한 베니스 비엔날레의 라투아니아 관의 〈태양과 바다(Sun & Sea)〉(2019), 일층의 사물을 위로 옮기는 퍼포머와 자동차와 고릴라가 등속운동하는 이야기를 테라스에서 내려다 보게 한 《아이소메트릭》(2018)이 그것입니다.

제가 이 각각의 ‘내려다보기’를 충분히 설명할 순 없겠지만, 작가로서 《아이소메트릭》을 제작해 본 경험에 한에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이 내려다보는 형식은 이상한 거리감을 발생시킵니다. 인간은 새처럼 공중에 날 수 없기에 위에서 아래로 대상을 볼 때 수직으로 내려다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각의 이상한 사선으로만 대상을 내려다볼 수 있죠. 저는 이런 사선으로 내려다보는 형식이 바라 본 대상과 보는 관람자를 분리시키고, 나아가 관객이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도록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만물이 구경거리인 시대이지만 우리는 스스로가 구경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지각하고 살진 않죠. 사선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폭력적인, 관찰자를 감춰주는 관람 방식을 통해서야, 역설적으로 스스로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아래 벌어지는 상황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안전한 위치를 보장받은 사람으로서 말이에요.

그래서 다시, 추출한 것들을 내려다보는 일은 뭘 뜻하나요? 작가님이 시립대를 졸업하신 것과, 그 학교가 흙으로 사람의 얼굴을 모방하는 ‘모델링’을 입학시험으로 치룬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저는 몇 번 떨어졌답니다.) 입시 때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서 좌우를 맞췄고, 그럴 때마다 두통이 생겨서 내려다보는 방식을 선호했다고 하셨는데요. 내려다볼 때마다 필연적으로 어떤 빈 부분(얼굴로 치면 턱 부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위에서 제가 예시로 든 작가들은, 이런 바라보기의 ‘빈 구멍’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일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감각하게 하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님의 두 번째 편지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정말 많았어요.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생물 분류의 체계에 작용하는 사회적 압력에 대한 내용, 알 수 없는 경로로 우리를 공격하는 화학 물질들,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것의 폭력성, 작업을 제작하는 주체인 줄 알았는데 사실 작업의 노예였던 경험, 무너짐의 창조성, 그리고 제 글을 다시 인용해 주신 “같은 방법으로 조각하기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유일한 기원이 아닌,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에로틱한 반복을 수행하는 일”이라는 말, ‘개방과 동시에 폐쇄가 되는 시선과 높이의 결탁’ 등.두 번째 편지의 지면에서 하지 못한 나머지 이야기는 언제 한 번 만나서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글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은 9월 6일로, 프리즈 주간이 한창입니다. 몇몇 오프닝과 파티에 참석하다 보니 몸이 탈진하고 숨을 잘 쉴 수 없었어요. 어제 어떤 작가와 줌으로 만나 대화했는데, 그가 더듬으며 말하면서 생겼던 긴 공백의 순간이 기억에 남습니다. 좀 더 정확한 말을 고르기 위해 신중했던 그 작가의 태도, 모든 순간과 삶 전체를 퍼포먼스로 다루고자 하는 거대하고도 겸손한 패기 앞에서, 저는 처참히 깨어졌답니다. 자신의 속도를 찾는 것, 그리고 제 숨을 쉬는 일. 그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럼, 작가님의 마지막 편지를 기다리겠습니다. 바쁜 시기에 몸과 마음이 건강하시길 바라요.


2024년 10월 1일
민훈→상현

안녕하세요, 상현 님. 오랜만에 답장을 보내요. 저는 요즘 작업실에서 새벽을 맞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해야 건강한 생활을 지킬 수 있을지 고민하는 날들입니다. 자꾸 실패하는 듯해요…

고민을 했었어요. 흔적 없이 다녀가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요? 아뇨… 그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항상 잔재를 남기고, 그 잔재는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낙관적이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나뭇등걸은 단순히 잘려 나간 나무의 잔재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뜨거운 기억이고, 이전과 다른 새로운 것이 시작하는 곳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은 무언가의 부재를 연상시키는 차가운 마주봄-응시가 되기도 할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다들 하나쯤은 갈망하는 것들이 있지 않나요? 제 가족과 제 친구들과 제 연인과 제 스승들이 각자의 시간을 빚고 있는 세계… 제 경우에는, 너무 빠른 사람들이 놓치고 가는 것들을 최대한 줍고 싶은 그런 생각이 있어요. 전 되게 느린 사람이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속도가 등수가 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그렇다면 저는 말씀하신 햄버거 게임에서 가장 아래 깔린 상황일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아주 느리고 깊은 것들, 쉽게 흐르지 않았거나 늘 그곳에 있어 왔던 것들이 있다면요.

무언가를 추출한다는 것. 얼마 전에 들은 말인데요, 바다에 최소 백만 명 이상의 선원이 언제나 항해하고 있다고 해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상현님이 글을 받아 읽을 시점에서도요. 떠다니는 거대한 컨테이너들, 저장고, 그 속에 올라탄 물건들을 떠올려봅니다. 얼마 전에 제 주변에서 TEMU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유행했어요. 저도 호기심에 셔츠 몇 장을 구입했는데, 놀랍도록 싼 가격에 물건을 받아볼 수 있었어요. 담배 한 갑보다 싼 셔츠라니… 물론 이것을 입고 밖에 나갈 수 있겠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어요. 문제는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는 겁니다. 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싼 가격에 물품을 구매할 수 있었고, 기업이 이런 심리로 박리다매를이뤄낸다면, 이 구조에선 무언가가 필히 착취당하고 있다는 것 아닐까요.

이건 오프라인의 문제만은 아닐 겁니다. 전 지구적인 네트워킹 속에서 우리는 똥 싸듯 데이터를 배설하는 기계입니다. 지난번 상현님이 일을 할 때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 것이 생각나요. 저 또한 인공지능과 자주 대화하기도 하고요. 처음으로 인공지능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을 때 느낀 경이로운 감정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여하튼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정보가 추출되어야 하겠습니다. 휴대 가능한 디지털 기기를 통해 삶의 많은 부분은 데이터가 되고, 인공지능은 이런 데이터를 눈 깜짝할 새 크롤링하여 무언가로 빚어냅니다. 이것은 제국주의의 유산이 작동하는 방식 중 하나가 되기도하겠죠. 물리적 자원을 추출하며 땅을 장악했던 방식이 이제는 삶의 데이터를 추출하여 권력의 땅을 그리고 있으므로, 우리의 몸과 삶 자체가 하나의 자원이 된 것입니다. 하나의 몸을 복수의 기업들이 꿰고 지나가며, 개인의 현실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유튜브나 넷플릭스의 알고리듬이 저에게 보여주는-추천하는 것은 기가 막히긴 하거든요. 알고리듬이 선제적으로 제 취향을 빚어가는 것 같고, 이것은 매우 편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아는 건, 내가 아니라 기업인 것만 같기도 해서요.

이런 인공지능은 학습에 기반한 가중치를 형성합니다. 지금의 다수가 상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정보들은 갈수록 순환하며 견고해질텐데, 그렇지 않은 것들은 고여있거나 묻히게 될 거예요. 우리의 모든 일상이 정보 불균형을 가속화한다는 점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할 사실일 겁니다. 그렇다면 데이터 생산으로부터 조차 탈락된 주체들의 기억은 어디로 가나요? 이런 일들은 가끔 당혹스럽게도 크게 느껴집니다.

첫 편지에서 사막에서 경험한 올려다봄(admiring), 내려다봄(condescending), 마주봄(facing)을 이야기했었죠. 올려다본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질에 압도당하는 것이기도 할 텐데, 동시에 그것을 더 잘 이해해 보려 다가서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내려다본다는 것은 위에서 바라보며 이해하려는 모습이지만, 턱의 대칭을 맞출 수 없던 것처럼 숨겨진 것을 간과하기 쉬운 것이고, 어떤 것을 놓치게 만들 것이기도 하고요. 또 마주봄은 긴장의 순간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방향들이 단순히 시각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자세와 태도를 통해 재감각될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무언가와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며 바라보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말을 걸어오는지 기다리는 일이 저에겐 필요한 일이라 느껴졌어요.

이런 의문을 안고 저는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땅, 그러니까 흙은 단순한 토양이 아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다층적인 이야기의 집합체입니다. 영토라는 개념이 달라붙어 육화된 곳이고, 인간과 비인간의 몸들이 뒤섞여 있는 곳이며, 곧 죽을 것들과 죽은 것들이 만들어낸 것이고, 또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곳이죠. 때문에 흙은 수동적인 삶의 ‘배경’이 아니라 능동적인 무엇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발 밑의 존재로 여겨지지만, 일전에 몇개의 일화를 언급한 것처럼 묻히고 잊히고 깔린 ‘유령’들이 밀도 높게 바글거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흙을 마주본다는 것은 이 얽힘을 바라볼 수 있길 희망함에서 나온 표현이었습니다. 거대한 유산을, 기억을, 혹은 압력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묻는 과정이었어요. 이런 의미에서 흙은 역사적인 주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사(verb)를 조각의 조건으로 삼았던 22년도의 개인전 《GRABO》에서, 저는 ‘빚기’를 재료로 찰흙을 빚어 화분 형태의 도기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전시가 끝난 후엔 거기에 흙을 담아 나리꽃을 길렀어요. 조각의 품 안에서 자라난 채도 높은 주황색 꽃, 그게 저한테는 꽤 근사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름, 익숙한 갈색 빛의 사막 사이에서 장미같이 붉은 바위가 떠올랐을 때, 그 빨강은 그 자체로 존재했습니다. 너무 강렬해서, 우리의 사이에 어떤 의미도 가져다 붙일 필요가 없는, 부담스럽게도 솔직한 얼굴, 달아오른 얼굴과의 ‘마주봄(facing)’ 그 자체였어요.

딛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표면 위에 있는 것이 아닌, 땅을 눌러 감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딛는다는 것은 중력에 대항해 일어서는 행위이고, 동시에 발을 지탱하는 것들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죠. 딛고 선 흙이 그 자체로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는 능동적인 무엇이라면 우리와 어떻게 눈을 맞추고 있을지요. 과연 제가 흙 속에 얽힌 씨실과 날실 사이 ‘매개들(mediums)’를 찾아볼 수 있을지요.

매개한다는 것은 둘 사이의 관계를 연결한다는 것이죠. 작년 이맘쯤 ‘매개체로서 밧줄과 매듭’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발표 준비를 하면서 고대부터 근현대의 시간을 오갔습니다. 초목의 넝쿨이나 나무껍질, 짐승 가죽 등으로 끈을 만들었던 것은 인류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운반과 농경 등의 분야에 폭넓게 활용되며 시대와 민족의 생활문화가 발전했고, 각각의 지역적 특징을 살린 매듭으로 나뉘어 발전해 왔습니다. 매듭언어(전승문자)는 남북아메리카나 동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사용되었고, 우리나라도 전라남도 지방에서 구한말까지 사용되었어요. 서양의 장식적인 매듭(macrame)은 바빌로니아로부터 기원했고, 정복의 역사대로 유럽에 전파되었습니다. 또 동아시아의 매듭 공예는 삼국이 서로 교류하며 발전시켜 왔습니다. 불상 유물에서 매듭과 술이 조각된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지 않나요? 밧줄과 매듭엔 다양한 상징적 의미들이 달라붙어 있어요. 지금 선박의 속도를 나타내는 노트(knot)도 매듭(knot)에서 유래한 말이고, 지금 어린이 스카우트가 배우는 파이어니어링(pioneering, 나뭇가지에 밧줄을 묶어 구조물을 만드는 것)도 과거 군대의 공병이 정복지를 개척할 때의 기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징들은 단순히 지나가버린 과거의 것으로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밧줄과 매듭은 어떤 시공간 속에서 다른 권력과 문화가 교차하며 의미가 혼합되기 했고, 정복의 역사처럼 재배치되기도 했으며, 때론 맥락이 소거되고 다른 목적을 위해 소환되기도 했습니다. 가령, 서양의 장식적인 매듭(macrame)이 과거 부유한 계층의 과시가 된 것은 문화 전유와 정복의 역사와도 달라붙어 있어요. 그래서 밧줄과 매듭을 도구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 그것의 기억들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나에게 어떤 말을 걸어올지 기대하며 올려다보기(admiring)로 한 것입니다.

그때 발표를 준비하며 한 공예가님과 대화를 했었는데, ‘소원을 빌지 않은 매듭은 엉킨 끈일 뿐이다. 두 손을 모아 정성껏 예뻐져라 주문을 외우면 즐거운 마음이 깃든다.’라고 하셨어요. 당시엔 뚱딴지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손을 움직이며 밧줄을 꼬다 보니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납득이 되네요. 그런 점에서 밧줄은 일종의 포털 같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마지막으로, 파키스탄이라는 먼 땅에서 뿌리 뽑혀, 배를 타고 머나먼 바다를 건너온 소금 덩어리는, 어떤 유목민 같은 존재입니다. 혹은 방주라고 표현해 볼 수도 있겠어요. 왜냐하면 이것은 거대한 바다의 흔적, 땅으로 밀려 나온 물의 엄청나게 오래 걸린 증발, 지구의 자치적인 아카이브, 누군가의 생업, 곡괭이를 들고 아침을 맞는 사람의 땀과 노동, 격정적인 근육의 떨림, 이사 중 비를 맞아 녹아내린 흔적, 유실의 아름다운 승격, 마치 협곡을 연상시키는 돌 위로 흐른 물의 자국, 까마득한 과거 유기체의 탄생, 절대적이고 바뀔 리 없는 소금에 대한 몸의 의존, 나폴레옹이 타고 있던 말이 발견한 소금 광맥, 매달린 소금 덩어리를 핥는 가축들, 물자의 이송, 경제적으로 최적화된 것으로부터 나의 이익, 지구적인 상업 네트워크를 껴안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이 덩어리들은 긴 여정을 끝내고 잠깐 쉬고 있는 잔재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살아있는 기록이에요. 이런 시선을 ‘내려다봄(condescending)’이라고 표현한 것은 소금 덩어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표한 말이었어요. 내려다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하신 말씀이 와닿습니다.

흙과 밧줄과 소금, 이것들을 다루기로 했던 결정은 결국 ‘나뭇등걸’이라는 질문으로 모이는 것 같아요. 어떤 것이 남는지, 어떤 것이 새로운 시작을 만들 수 있는지, 그 경계는 어디인지. 나뭇등걸은 단순히 잘려나간 나무의 흔적이 아니라 그 자리에 걸터앉을 수 있도록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 과일과 팔다리와 몸통을 내어준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이 품고 있는 기억을 쫓아보고 싶습니다.

그럼, 이만 줄일게요. 마지막 답장은 전시를 보신 후 써주시면 어떨까요. 편지를 쓰다 보니 어느새 가을이 왔어요. 열어둔 창에서 넘어오는 귀뚜라미 소리가 듣기 좋은 밤이네요. 올해의 남은 일정들을 응원합니다. 곧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