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s
딱딱한 감자탕
(하나) 《틈믙》은 ‘틈'이라는 글자에서 착안하여,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따라 틈이 될 수도, 믙이 될 수도 있는 중간적 영역과 수평/수직의 변증법을 동시에 은유한다.
(둘) 형식(form)은 의미를 재맥락화한다. 통일과 축, 조화, 질서의 평면. 직립과 수직, 야외, 정면성의 입체. 일종의 양식(style)처럼 자리잡은 시각예술의 형식은 서구중심적 관념론을 더욱 견고히 한다. 그렇기에 형식의 변주는 어떠한 사물이 위치하는 관계와 방식을 바꾸어 놓기 위한 최소한의 편법으로 기능한다.
(셋) 작가의 ‘구작’은 타 전시로 포섭되는 과정을 토대로 다른 맥락의 ‘축’ 위에 위치한다. 작품과 사물은 그것이 등장하는 조건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변형된 축을 만들어낸다. 수직을 기원으로, 기울어진 축으로서의 수평. 필연적 기호와 우연적 독해. 인간과 사물, 이미지, 장소와 같은 유동적 산물은 새로운 축에 휘말리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위치의 궤적을 재고하는 과정을 경유한다.
(넷) 전시는 장소에 의해, 장소에 따라, 장소를 매개로 한다. 대상과 사물이 위치했던 이전의 장소와 지금의 장소, 그리고 안과 밖. 두 가지의 대립점에서 발생되는 이질감은 그것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질서와 위계에 의문을 던지고, 사이 간극에 침투하여 또다른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는 ‘틈’을 제공한다.
(다섯) 공간 일리는 곳곳에 틈이 벌어진 곳, 쳐다보면 안되는 틈이 숨어있는 곳, 드러나선 안되는 틈이 존재하는 곳. 이를 장르 문화적으로 서술하자면 공간과 사물은 ‘으스스한 분위기, 기이한 형식, 알 수 없는 대상의 응시’와 같은 기묘한 감각으로 이어진다. 감자탕과 냉면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리를 들춰내고 틈을 벌려내며, 비가시적인 영역을 가시화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덧대었다. ‘틈’은 벌어지고 다시 메워지고, 개방되고 다시 폐쇄되면서 만들어진다. 차이를 드러내는 장소로서의 ‘틈새’는 형식의 변주를 통해 다시금 공통의 장소를 구성해낸다.
(여섯) 김민훈은 ‘기둥’과 같은 형상을 토대로 수직과 수평을 교차해내며 여러 사건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기둥은 세워진다는 행위를 통해 전통적으로 여러 대상 — 권력, 공동체, 신, 믿음 등 — 을 지탱해왔으리라 믿어지지만, 작가는 이를 가치와 질서의 가능성을 고민하기 위한 축으로 이용한다. 여기서 두 개의 조각은 세워지지만, 두 개의 조각은 눕혀진다. 누운 두 조각은 세워지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결과적으로는 직립하기에 실패하여 작가의 작업실에 남겨진 것들이다. 또 다른 조각은 사람이 관통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형태로 제작되었으나, 일리에서는 공간을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곳으로 막아버린다.
(일곱) 김대유는 매순간 변화하는 장면의 움직임을 화폭에 담아낸다. 주관적인 정경을 다루는 그의 작품은, 그렇기에 매순간 다르게 감각될 수밖에 없는 화면을 구성해낸다. 일리의 마루, 가운데 크게 위치하게 된 장면은 밝은 빛이 스며드는 틈, 우거진 나무와 수풀 사이 어딘가를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벌어진 사이이자 순간으로, 일리의 시간을 열어주는 현상적 경험으로 우리를 이끈다. 짙은 녹색으로 세워진 나무는 일렬로 직립한 채, 공간 안팎에 공존하는 수직과 수평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여덟) 《틈믙》은 대상과의 관계성과 응시가 유발하는 고독한 유령의 서술을 일종의 ‘틈’으로 비유하여, 전시를 조직하는 여러 틈이 어떠한 관계성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이는 작품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틈’을 그것이 위치하는 공간의 ‘틈’과 병치하는 일이기도 하며, 동시에 다른 방법으로 자리하게 되었을 때 다시금 발생하는 ‘틈’을 벌리는 역할을 은유하기도 한다.
(아홉) 추신. 여기서 감자탕과 냉면이라는 큐레이터의 가명은 전시의 제목 《틈믙》이 한글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 것처럼, 한글의 자음 중 기역(ㄱ)과 니은(ㄴ)으로 시작하는 가장 토속적인 음식 중 하나를 선별함으로써 정해진다. 감자탕을 좋아하는 문 큐레이터와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백 큐레이터. 여기에는 잔잔한 토속색과 형식의 변주를 토대로 한 장난이 섞여있다.
(하나) 《틈믙》은 ‘틈'이라는 글자에서 착안하여,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따라 틈이 될 수도, 믙이 될 수도 있는 중간적 영역과 수평/수직의 변증법을 동시에 은유한다.
(둘) 형식(form)은 의미를 재맥락화한다. 통일과 축, 조화, 질서의 평면. 직립과 수직, 야외, 정면성의 입체. 일종의 양식(style)처럼 자리잡은 시각예술의 형식은 서구중심적 관념론을 더욱 견고히 한다. 그렇기에 형식의 변주는 어떠한 사물이 위치하는 관계와 방식을 바꾸어 놓기 위한 최소한의 편법으로 기능한다.
(셋) 작가의 ‘구작’은 타 전시로 포섭되는 과정을 토대로 다른 맥락의 ‘축’ 위에 위치한다. 작품과 사물은 그것이 등장하는 조건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것만으로도 변형된 축을 만들어낸다. 수직을 기원으로, 기울어진 축으로서의 수평. 필연적 기호와 우연적 독해. 인간과 사물, 이미지, 장소와 같은 유동적 산물은 새로운 축에 휘말리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위치의 궤적을 재고하는 과정을 경유한다.
(넷) 전시는 장소에 의해, 장소에 따라, 장소를 매개로 한다. 대상과 사물이 위치했던 이전의 장소와 지금의 장소, 그리고 안과 밖. 두 가지의 대립점에서 발생되는 이질감은 그것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질서와 위계에 의문을 던지고, 사이 간극에 침투하여 또다른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는 ‘틈’을 제공한다.
(다섯) 공간 일리는 곳곳에 틈이 벌어진 곳, 쳐다보면 안되는 틈이 숨어있는 곳, 드러나선 안되는 틈이 존재하는 곳. 이를 장르 문화적으로 서술하자면 공간과 사물은 ‘으스스한 분위기, 기이한 형식, 알 수 없는 대상의 응시’와 같은 기묘한 감각으로 이어진다. 감자탕과 냉면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리를 들춰내고 틈을 벌려내며, 비가시적인 영역을 가시화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덧대었다. ‘틈’은 벌어지고 다시 메워지고, 개방되고 다시 폐쇄되면서 만들어진다. 차이를 드러내는 장소로서의 ‘틈새’는 형식의 변주를 통해 다시금 공통의 장소를 구성해낸다.
(여섯) 김민훈은 ‘기둥’과 같은 형상을 토대로 수직과 수평을 교차해내며 여러 사건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기둥은 세워진다는 행위를 통해 전통적으로 여러 대상 — 권력, 공동체, 신, 믿음 등 — 을 지탱해왔으리라 믿어지지만, 작가는 이를 가치와 질서의 가능성을 고민하기 위한 축으로 이용한다. 여기서 두 개의 조각은 세워지지만, 두 개의 조각은 눕혀진다. 누운 두 조각은 세워지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결과적으로는 직립하기에 실패하여 작가의 작업실에 남겨진 것들이다. 또 다른 조각은 사람이 관통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형태로 제작되었으나, 일리에서는 공간을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곳으로 막아버린다.
(일곱) 김대유는 매순간 변화하는 장면의 움직임을 화폭에 담아낸다. 주관적인 정경을 다루는 그의 작품은, 그렇기에 매순간 다르게 감각될 수밖에 없는 화면을 구성해낸다. 일리의 마루, 가운데 크게 위치하게 된 장면은 밝은 빛이 스며드는 틈, 우거진 나무와 수풀 사이 어딘가를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벌어진 사이이자 순간으로, 일리의 시간을 열어주는 현상적 경험으로 우리를 이끈다. 짙은 녹색으로 세워진 나무는 일렬로 직립한 채, 공간 안팎에 공존하는 수직과 수평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여덟) 《틈믙》은 대상과의 관계성과 응시가 유발하는 고독한 유령의 서술을 일종의 ‘틈’으로 비유하여, 전시를 조직하는 여러 틈이 어떠한 관계성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이는 작품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틈’을 그것이 위치하는 공간의 ‘틈’과 병치하는 일이기도 하며, 동시에 다른 방법으로 자리하게 되었을 때 다시금 발생하는 ‘틈’을 벌리는 역할을 은유하기도 한다.
(아홉) 추신. 여기서 감자탕과 냉면이라는 큐레이터의 가명은 전시의 제목 《틈믙》이 한글의 조합을 통해 만들어진 것처럼, 한글의 자음 중 기역(ㄱ)과 니은(ㄴ)으로 시작하는 가장 토속적인 음식 중 하나를 선별함으로써 정해진다. 감자탕을 좋아하는 문 큐레이터와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백 큐레이터. 여기에는 잔잔한 토속색과 형식의 변주를 토대로 한 장난이 섞여있다.
슴슴한 냉면
(하루) 어김없이 사는 날 잊었나 보다. 눈을 감아도 오늘은 속절없이 달린다. 죄송합니다. 너는 그저 맹렬히 사과하고 싶은데 입에서 웅얼거리는 밤매미의 게으름을 탓한다. 우는가. 물구슬이 고이는 나날은 뱃속에 삼킨 이름을 뱉는다.
(이틀) 비는 그치지 않았다. 네 울음을 보는 날, 네 사람이 오목 두는 약속을 맺는다. 모두가 흰알인 어느새 너는 다섯 번째, 마지막 알을 둔다. 등 뒤 그늘에서 게으른 패배가 반갑기에, 다섯 손가락과 다섯 알은 여름이 쉴 결말에 닿는다.
(사흘) 다시 찾아오는 밤, 너는 그때 끝냈어야 한다는 훈수에 반박한다. 손과 손끝은 더 오랜 시간을 꿈꾸자고 다시 약속한다. 볕뉘가 숨는 마당집에 고섶마다 충무로 식탁에 흘린 물구슬 수만큼 쪽지를 숨겼다. 편지 열 네 장을 보내는 내일이 있기에 보물 찾는 놀이를 즐겼던 어제가 남는다. 지도는 이 글이다.
(나흘) 다시 그 말을 반복해야 한다. 너는 믙을 말해야 한다. 웅덩이에 비친 틈은 티읕을 닫고 미음을 연다. 믙은 오직 잔잔한 수면에서 드러난다. 입이 두 번 웃는 모양으로 이름을 부르자 수면이 떨린다. 네가 웃는 소리는 마찰하는 새벽이자 균열하는 저녁이다. 트집에 빛나는 새가 머물고 틈새에 그늘 집이 열린다. 흠이 아닌 껍질. 금이 아닌 주름. 틈이 벌어지고 별과 별이 가까워지는 세 번째 약속에 우리가 있다. 손끝이 기울어진 땅을 쓰다듬는다. 끝내 무엇을 찾을까. 틈마다 주인이 있다. 그곳에 바람이 불면 주인을 밀어내는 소리가 난다. 태동하는 단서를 찾는 부단한 움직임이 마당을 쓴다.
(닷새) 우물이 깜빡인다. 이곳에서 하여금 믙을 보는 두 사람은 흔적에 잠긴다. 가장 곧은 빗금을 등진 사람에게 획과 획 사이 믙은 하늘과 땅 사이 틈을 거니는 그늘과 숨이다. 기울이는 움직임 따라 벽은 바닥으로 전조하고, 같은 곳에 서있는 다른 이는 색이 젖은 실매듭이 감긴 몸에게 고백하건데, 눕고 싶다 말한다. 단도직입하는 입은 너의 곁에서 사라진 시적 화자의 흔적을 찾으라 말한다. 나긋하고 영민한 눈은 그것을 잊기 바란다.
(엿새) 마루는 마당에 혀를 내민다. 더위를 식히는 인사 너머에 울창한 햇빛과 낭창한 풀내를 맛보는 미각 기관은 온전히 스스로를 여름에게 기울인다. 진실한 춤으로 회색 살갗을 이리저리 내보이는 울렁거림이 그저 반갑다. 먼저 도착한 포도 줄기는 어젯밤 뒹군 모양으로 머리부터 뿌리까지 시멘트를 휘감는다. 달콤한 향기가 살랑인다. 춤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그림자에게서 그들은 기어코 혀를 자른다. (본래 잘린 살이었을까) 잃어버린 짝은 길섶 창고 머리 위에서 세 도막으로 너를 기다린다. 단소를 부세요. 대나무를 죽인 손에게 의문이 생긴다. 과자를 구워주세요. 그것은 진심이다. 회색 근육를 부풀어 언덕을 쌓은 손에게는 꿈이 있다.
(이레) 낮의 등껍질은 밤 틈이 잠드는 자리다. 갈라지는 소리가 여미는 몸은 지난 나무의 꿈을 허파에 담는다. 무화과를 심은 손은 내장 내벽에 움직이는 꿈을 새긴다. 사랑합니다. 다정한 움직임은 멀리서 본 벽을 가까이 본 빛으로 번역한다. 아직 낭만이 남은 볕뉘에 비가 내린다. 무지개가 뜨는 필연은 마당을 닦는 자의 것이 아니다. 방에 심은 나무와 마당에 세운 돌과 나란히 보이는 각도를 마련한다.
(여드레) 언제까지 세검정에서 떡볶이와 순대와 튀김과 과일 주스를 입속에 감추는 부지런함을 만날 수 있을까. 아이들 사이 흰돌 넷이 돌바닥 위에 뒤뚱거리는 자세로 빈집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비밀번호 네 자리는 바닥에 계단을 덮은 뚜껑도 열고 뒷편에 기와를 가린 창문도 여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발이다. 어쩌면 괜히 바쁘다. 빗줄기가 지붕을 두드리는 나직한 소리는 너와 내 벗이 되어 기꺼이 등뒤를 맡긴다. 떠난 아이는 글 끝에서 조금 충실하게 열매를 떨어트린다.
(아흐레) 내일은 울음이 다시 기어오르는 밤에서도 가야하는 길을 보는 날이다. 먼지를 씻고자 마당에 물을 분사하다가 다시금 돌아오지 못한 누군가와 그의 가족을 생각한다. 물구슬이 하수구로 향한다. 사람을 모으는 일에 사람이 모이는 몫은 빈 마당이 아니라 마땅히 다른 자리의 몫을 보는 일이다. 떠난 이를 기린다. 마당 어느 한켠에 함께 슬퍼하는 별빛을 심어 목소리를 전한다.(화성공장 화재참사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하루) 어김없이 사는 날 잊었나 보다. 눈을 감아도 오늘은 속절없이 달린다. 죄송합니다. 너는 그저 맹렬히 사과하고 싶은데 입에서 웅얼거리는 밤매미의 게으름을 탓한다. 우는가. 물구슬이 고이는 나날은 뱃속에 삼킨 이름을 뱉는다.
(이틀) 비는 그치지 않았다. 네 울음을 보는 날, 네 사람이 오목 두는 약속을 맺는다. 모두가 흰알인 어느새 너는 다섯 번째, 마지막 알을 둔다. 등 뒤 그늘에서 게으른 패배가 반갑기에, 다섯 손가락과 다섯 알은 여름이 쉴 결말에 닿는다.
(사흘) 다시 찾아오는 밤, 너는 그때 끝냈어야 한다는 훈수에 반박한다. 손과 손끝은 더 오랜 시간을 꿈꾸자고 다시 약속한다. 볕뉘가 숨는 마당집에 고섶마다 충무로 식탁에 흘린 물구슬 수만큼 쪽지를 숨겼다. 편지 열 네 장을 보내는 내일이 있기에 보물 찾는 놀이를 즐겼던 어제가 남는다. 지도는 이 글이다.
(나흘) 다시 그 말을 반복해야 한다. 너는 믙을 말해야 한다. 웅덩이에 비친 틈은 티읕을 닫고 미음을 연다. 믙은 오직 잔잔한 수면에서 드러난다. 입이 두 번 웃는 모양으로 이름을 부르자 수면이 떨린다. 네가 웃는 소리는 마찰하는 새벽이자 균열하는 저녁이다. 트집에 빛나는 새가 머물고 틈새에 그늘 집이 열린다. 흠이 아닌 껍질. 금이 아닌 주름. 틈이 벌어지고 별과 별이 가까워지는 세 번째 약속에 우리가 있다. 손끝이 기울어진 땅을 쓰다듬는다. 끝내 무엇을 찾을까. 틈마다 주인이 있다. 그곳에 바람이 불면 주인을 밀어내는 소리가 난다. 태동하는 단서를 찾는 부단한 움직임이 마당을 쓴다.
(닷새) 우물이 깜빡인다. 이곳에서 하여금 믙을 보는 두 사람은 흔적에 잠긴다. 가장 곧은 빗금을 등진 사람에게 획과 획 사이 믙은 하늘과 땅 사이 틈을 거니는 그늘과 숨이다. 기울이는 움직임 따라 벽은 바닥으로 전조하고, 같은 곳에 서있는 다른 이는 색이 젖은 실매듭이 감긴 몸에게 고백하건데, 눕고 싶다 말한다. 단도직입하는 입은 너의 곁에서 사라진 시적 화자의 흔적을 찾으라 말한다. 나긋하고 영민한 눈은 그것을 잊기 바란다.
(엿새) 마루는 마당에 혀를 내민다. 더위를 식히는 인사 너머에 울창한 햇빛과 낭창한 풀내를 맛보는 미각 기관은 온전히 스스로를 여름에게 기울인다. 진실한 춤으로 회색 살갗을 이리저리 내보이는 울렁거림이 그저 반갑다. 먼저 도착한 포도 줄기는 어젯밤 뒹군 모양으로 머리부터 뿌리까지 시멘트를 휘감는다. 달콤한 향기가 살랑인다. 춤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그림자에게서 그들은 기어코 혀를 자른다. (본래 잘린 살이었을까) 잃어버린 짝은 길섶 창고 머리 위에서 세 도막으로 너를 기다린다. 단소를 부세요. 대나무를 죽인 손에게 의문이 생긴다. 과자를 구워주세요. 그것은 진심이다. 회색 근육를 부풀어 언덕을 쌓은 손에게는 꿈이 있다.
(이레) 낮의 등껍질은 밤 틈이 잠드는 자리다. 갈라지는 소리가 여미는 몸은 지난 나무의 꿈을 허파에 담는다. 무화과를 심은 손은 내장 내벽에 움직이는 꿈을 새긴다. 사랑합니다. 다정한 움직임은 멀리서 본 벽을 가까이 본 빛으로 번역한다. 아직 낭만이 남은 볕뉘에 비가 내린다. 무지개가 뜨는 필연은 마당을 닦는 자의 것이 아니다. 방에 심은 나무와 마당에 세운 돌과 나란히 보이는 각도를 마련한다.
(여드레) 언제까지 세검정에서 떡볶이와 순대와 튀김과 과일 주스를 입속에 감추는 부지런함을 만날 수 있을까. 아이들 사이 흰돌 넷이 돌바닥 위에 뒤뚱거리는 자세로 빈집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비밀번호 네 자리는 바닥에 계단을 덮은 뚜껑도 열고 뒷편에 기와를 가린 창문도 여는 우리의 것이다. 우리는 발이다. 어쩌면 괜히 바쁘다. 빗줄기가 지붕을 두드리는 나직한 소리는 너와 내 벗이 되어 기꺼이 등뒤를 맡긴다. 떠난 아이는 글 끝에서 조금 충실하게 열매를 떨어트린다.
(아흐레) 내일은 울음이 다시 기어오르는 밤에서도 가야하는 길을 보는 날이다. 먼지를 씻고자 마당에 물을 분사하다가 다시금 돌아오지 못한 누군가와 그의 가족을 생각한다. 물구슬이 하수구로 향한다. 사람을 모으는 일에 사람이 모이는 몫은 빈 마당이 아니라 마땅히 다른 자리의 몫을 보는 일이다. 떠난 이를 기린다. 마당 어느 한켠에 함께 슬퍼하는 별빛을 심어 목소리를 전한다.(화성공장 화재참사 희생자분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