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update : 2025.01.29.                            mminh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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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기 20세기 물질세계와 인간:
          ‘관람객 23’의 소심한 소금석, 밧줄매듭, 흙기둥 이야기

       
          김승진 / 환경사회학 강사


텍스트화되어 있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


“전시”를 보고 “글”을 써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전시장에는 몇몇 물질로 만들어진 작품이 있었고, “글”로 되어 있는 것은 사용된 물질에 대한 사실정보(“산화철과 쪽풀로 염색한 밧줄,” “시멘트 위에 생활폐기물 위에 철망 위에 흙 혼합물[흙, 석회, 산화철, 천연안료] 위에 새끼줄”)와 그 물질을 작품으로 바꾸면서 작가가 부여했을 상징에 대한 힌트(“바람춤 가르마,” “손돌 불의 협곡”)가 전부였다. 물질 정보도 상징적인 제목도 지극히 간략했고, 건조한 사실정보와 짙은 은유가 압축된 제목을 이어주는 더 이상의 무언가는 “글”로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 “무언가”를 이제 눈 앞의 사물들에서 내가 읽어내야 할 모양이었는데, 소금석, 밧줄매듭, 흙기둥이 직접 말로 풀어줄 리 만무했다.

나는 예술에 문외한이고 작가도 내게 예술비평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기자, 번역가, 대학강사로 일했다. 이제까지 내가 쓴 글은 늘 “알아내야” 하고 “제대로 가서 닿아야” 하는 진실이 있음을 전제로 했다. 기사도 번역서도 강의록도, 정보의 “원 실체”에 충실하게 닿지 못하면 객관성을 결여한 글, 진정성 없는 글, 심하면 왜곡이나 오류인 글이 되고 만다. “원 실체”에 접근할 때는 늘 인터뷰, 기록, 원서, 논문 등 말이나 글로 된 재료에 의존했고, 사물 자체를 직접 읽어내야 했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전시물이 품은 “진실”을 말로 풀어줄 누군가를 찾으려 했다. 고대 유물에 대한 전시라면 고고학자에게, 시대상을 담은 물건의 전시라면 역사학자나 미술사학자에게, 화석에 대한 전시라면 고생물학자에게, 사물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물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술 전시이니 작가에게 물어보자!

전시장에서 작가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부탁했고 글을 뽑아내기 위해 질문을 쏟아냈다. 흙기둥 안의 내용물인 폐기물은 왜 보이지 않게 했는가, 왜 산업사회의 물건들이 아닌가, 새끼줄을 꼴 때 어디에서 멈춰야 할지는 어떤 방식으로 감이 오는가, 소금석 원석을 덩어리째 수입할 때 에피소드는 없었는가, 흙의 물성이 드러나지 않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매듭의 형태마다 의미가 다른가, 일곱 흙기둥이 각자 사연을 담고 있다는 것이 왜 명시적이지 않은가, 흙이 채취된 장소가 각 기둥의 사연과 관련이 있는가, 소금석과 밧줄매듭을 눈높이에서는 관찰이 어렵게 배치한 이유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색상에 대한 기준은 무엇인가, 주절주절 기타 등등… 작가는 모두 친절하게 답해주었지만 전시에 (그리고 도록에) 그것이 드러날 필요는 없다고 했고, 오히려 작가의 작업 과정, 작가의 에피소드, 작가가 부여한 의미가 관람객에게 너무 부과되는 것을 경계했다. 게다가 도록에는 작가 본인이 원하는 정도까지 충분히 스스로를 드러낼 공간이 있으니 “작가님의 의도를 제가 왜곡 없이 전달할게요”라는 접근 자체가 오만이었다.

그리하여 다시 처음의 고민으로 되돌아왔다. 예술품으로서의 사물, 그 예술품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 그리고 그것을 빚어낸 예술가의 서사를 모두 온전히 존중하는 관람객으로서, 여기에 있는 사물들에서 내가 합당하게 읽어내어 글로 적을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의미의 “접점”: 거창한 제목과 소심한 부제에 대하여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내가 부여잡은 키워드는 “접점”이다. 원래의 접근방식은 1) 사물, 질료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 2) 사물과 질료의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이해로서의 이야기, 3) 작가 자신의 삶이 투영된 창조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이 세 가지 서사가 융합된 모종의 “원 실체”를 읽어내야만 왜곡 없는 글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여전히 그런 글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물질에 대해서도 예술에 대해서도 문외한인 나의 범위를 넘어선다. 나로서 최대한은 원 실체에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접하기만 한다면 하나의 빈약한 “점” 이상이 되지 못한다. 어딘가에 접할 때 나 역시 내가 가진 자원을 최대로 가지고 가서 접해야 그 접점이 하나의 “점”보다 풍성한 “면적”과 “공간”을 갖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주관적인 왜곡과 뭐가 다르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고 타당한 지적이지만, “나의 자원을 동원한다”는 것이 내가 접할 대상을 덮어씌우거나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충실하게 접하기 위해서라면 다르다고 주장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접점”이라는 키워드는 작가의 내러티브가 숨겨지고 관람객[나]의 내러티브가 얹혀지는 상황이나 작가의 내러티브와 관람객[나]의 내러티브가 소통 없이 각자 갈 길 가는 상황을 모두 피하면서 글을 쓸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이것이 이 글에 거창한 제목(“장기 20세기 물질 세계와 인간”)과 소심한 부제(“‘관람객 23’의 소심한 소금석, 밧줄매듭, 흙기둥 이야기”)가 붙은 연유다. 나는 물질과 인간의 관계에 관심이 많고 그에 대해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특히 물질-인간의 관계가 화석연료 기반 산업화를 거치며 질적으로 달라진 “장기 20세기”가 관심사다. 물질-인간의 관계를 고찰할 때 사회학 강사로서 나의 전제는 “인간은 물질을 제도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의 제도와 문화적 상징 기제의 작용으로 의미가 덧씌워진 상태로 물질을 경험하며 물질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사회적 작용에 끊임없이 참여한다. 따라서 물질의 속성은 물리적인 특성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에서 부여된 미적, 상품적, 의례상징적 가치로서도 규정된다.”[1] 이것이 이 전시를 숙고할 때 동원할 나의 자원이다. 하지만 나는 소금, 밧줄, 흙이라는 물질에도, 예술과 창작이라는 영역에도 문외한인 한 명의 행인에 불과하므로, 행인 1도 행인 2도 아닌 행인 23쯤 되는 한 관람객이 소금과 밧줄과 흙으로 예술가가 빚은 작품에 조심스럽게 접해보는 시도라는 점을 부제에 담았다.


장기 20세기 물질세계와 인간


지난해에 작가는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출발해 인간의 일상을 지탱해주는 “몇 가지 물질을 오래 들여다보고자 하는 전시”를 기획했으며 구체적으로는 “흙으로 만든 거석 조각과, 밧줄의 매듭으로만 구성된 수공예적 조각, 소금석을 수석의 형태로 만든 조각”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일상의 물건”이라는 키워드는 지속적인 생산 및 소비와 관련해 1) 경제적 유용성이라는 개념과 떼어놓을 수 없고 2) 장기 20세기의 맥락에서는 “대량” 생산과 “글로벌하게” 펼쳐지는 가치사슬과도 떼어놓을 수 없다.

사실 전시된 사물들 자체는 둘 중 어디에도 직접적으로 조응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첫째, “장기 20세기,” 즉 현대 세계의 물질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인공 조미료가 아닌 소금이, 그것도 원석의 형태로 놓여있었고, 밧줄은 전통 매듭의 형태였으며, 이제 흙으로 벽을 바르지는 않으니 흙기둥은 현대 건조환경built environment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둘째, 전시물들은 “일상의 물건”이라는 데서 내가 습관적으로 떠올렸던 “유용성” 개념을 거부하고 있었다. 원석 상태로의 소금은 일상에서 유용할 수 없다. 매듭만 남은 밧줄은 당기고 조이는 “끈”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길게 늘어뜨려진 “줄” 부분이 있었지만 당겨올려주는 기능을 상실한 채 허공에서 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흙기둥은 집이 되기에는 낮은 높이였고 지붕도, 벽도 지탱하고 있지 않았다.

기능적인 쓰임새가 탈각되고 현대 이전의 세계를 연상시키는 형태를 취한 전시물을 장기 20세기 물질세계의 맥락으로 가져와보면, 현대 물질세계에서 “비가시화”되는 부분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소금이 아닌 산에서 캔 소금석은 자연스럽게 채굴 경제와 연결된다. 소금석은 완제품인 “히말라야 핑크솔트”가 비가시화하는 두 가지 시간성을 되살린다. 하나는 소금 광맥이 형성되기까지의 지질학적 시간이다. 파키스탄에 있는 케라 소금 광산은 5억~6억 년 전 고대 내륙 바다가 증발하고 지각운동으로 압축, 융기되어 생겼다고 한다.[2] 모든 광물은 인간의 시간 단위를 넘는 세월의 산물이지만, 인간이 발견했을 때 그것은 그저 “주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은유는 냅다 인간의 유용성 판단에 노출되어버린 물질의 은유이고, 실은 그것이 우리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거저 주어진 것, 아낌없이 써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물질의 세월을 존중하기를 편리하게도 잊은 데 대한 은유다.

소금석이 드러내는 또 하나의 긴 시간성은 인간이 발견한 이후에 채굴부터 생산, 운송을 거쳐 소비자(식탁, 스파, 램프 가게 등등)에게까지 오는 가치사슬의 과정이다. 지질학적 실체인 광물이 “채굴 경제”라는 인간의 제도로 들어오면, 경제적 가치는 그것의 형성에 들어간 자연의 모든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제도의 작용에 따라 결정된다. 부가가치 사슬의 맨 앞단인 채굴단, 거기에서 원석을 캐는 노동은 가장 돈이 되지 않는 영역이다. 기사에 따르면, 소금석 원석은 톤당 40달러에 수출된다고 한다. 더 부가가치가 높은 완제품은 주로 다른 나라들에서 만들어지는데, 가령 “소금석 젠 큐브” 완제품은 미국에서 개당 16달러에 팔린다. 파키스탄에서는 히말라야 소금에 파키스탄산이라는 원산지 트레이드마크를 붙이자는 논의가 있었다는데, 채굴단에 경제적 가치를 조금 더 분배하겠다는 의도는 “파키스탄”이라는 국가보다는 “만년설 덮인 청정한 히말라야”를 연상시키는 것이 유리할 소금의 상품 가치와 충돌할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가 원하는 그 이미지는 실제로 물질에 관여된 중요한 작용들(지질, 노동, 제도, 교역)을 비가시화한다. 소금석에서 다른 광물들로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면, 의식적으로 부정의를 재가시화하려는 소비자의 노력도 채굴단의 부정의를 비가시화할 수 있다. 기후변화의 부정의에 대응하고자 탈탄소로 가야 한다는 당위는 전기차 등 탈탄소 기기에 들어가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주요 원료의 채굴단에서 강제노동, 아동노동, 채무노동, 환경파괴 등을 강화하고 동시에 “그린 채굴,” “지속가능한 채굴”이라는 형용모순으로 그것을 비가시화한다.[3]

전시장의 밧줄은 매듭 공예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매듭의 목적은 풀리지 않게 엮는 것이므로 당기고 조여주는 끈과 함께가 아니라면 매듭만으로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 천정에서 늘어뜨려진 끈은, 그 끈을 붙잡으면 끌어올려줄 것 같다기보다는(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처럼) 아직은 매달려 있되 사실은 버려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매듭 자체가 현대 사회의 일상에서는 기능할 일이 많지 않다. 흩어지지 않게 묶고 잇고 붙이는 기능은 이제 접착 테이프의 몫이고 정성껏 여미고 묶는 태도와 매듭의 손기술은 일상의 영역이 아니라 공예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물론 일상에 공예과 장식은 존재하지만, 장식은 그것보다 크기가 큰 배경의 지지를 받아야 하는데 배경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전시장의 거대한 장식 매듭은 장식의 기능마저 거부하는 듯했다. 기능 없이 나타난 거대한 장식 매듭은 현대 사회에서 “기능이 없어졌다”고 취급되는 것들이 비가시화됨을 상기시킨다. 현대의 물질세계에서 “기능이 박탈된 것”은 어딘가로 버려지며, 버려진 곳에서 제 기능을 하려 하면 인간에게 역기능이 된다. 가령, 기능하지 않아야 할 곳으로 가면 매듭의 조이고 묶고 당기는 기능은 “엉킴”이 되고 얽지 말아야 할 것들을 얽는 역기능이 된다. 지난해의 한 기사에 따르면 2009~2021년에 한국 해안선 인근에서 발생한 해양쓰레기 중 밧줄이 약 52%, 비닐이 약 39%, 그물이 약 3%를 차지했다고 한다.[4] 기사는 “바다에 버려진 밧줄은 선박사고의 원인이 되고, 해양동물의 생존에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 바닷속에서 단단히 엉키면 수거도 어렵다”고 버려진 끈과 매듭의 역기능을 설명한다. 당기고 조이는 기능을 상실하고 버려진 밧줄은 엉킴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곤경은 다시 이 전시에서 아름다운 매듭의 형태를 한 밧줄로 드러난다.  

전시에서 흙은 생명을 자라게 하는 “땅”으로서의 흙이 아닌 벽을 바르는 건축 자재로서의 흙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흙기둥들을 채우고 있는 것, 흙이 땅에서 일어나 서 있을 수 있게 받치고 있는 것은 생활폐기물이었다. 흙기둥이 “흙으로 둘러싼 생활폐기물”임을 알고서 보니, 인간에게 해로운 것을 파묻어 “격리”하는, 땅의 또 다른 기능이 겹쳐졌다. 장기 20세기의 대량생산, 대량소비는 당연히 대량폐기를 수반했고, 수거되지 않은 폐기물이 야기하는 공중보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빠른 수거와 영구 격리”를 핵심으로 하는 폐기물 처리 시스템을 마련했다. [5] 전에는 땅에 파묻는 것이 “순환”을 의미했다면 이제 두 가지 의미에서 땅에 파묻히는 물질은 순환되지 않는다. 첫째, 생태의 차원에서 많은 물질이 물리적, 자연적으로 순환이 불가능하다. 둘째, 격리에 실패해 인간 생활 반경으로 순환되어 들어오면 독성 물질 누출이라는 재난 상황이 된다. 살처분된 대량의 동물 사체이건, 화학공장의 화학폐기물이건, 우리가 날마다 내어놓는 1인당 1kg이 넘는 양의 생활쓰레기이건, 현대 물질문명이 배출하는 불편한 흔적을 우리는 땅에 매몰지, 매립장, 처분장을 지어 파묻고 비가시화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공간의 문제와 시간의 문제 모두에서 한계에 부닥쳐 허덕이고 있다. 공간의 문제는 충분한 격리 공간이 있는가이고, 시간의 문제는 충분히 영구적으로 격리할 기술이 있는가다. 공간이 있어 유해 물질을 땅에 격리했더라도 땅이 그것을 안전하게 봉쇄하고 있을 수 있는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면 그 땅은 알 수 없는 여러 물질들로 흙의 색이 아닌 여러 색을 하고서 우리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전시장의 흙기둥은 생활쓰레기들을 여전히 안에 잘 담고 있었다. 수평의 땅이 자기 안의 폐기물과 함께 힘겹게 일어서서, 오염된 땅의 복수로서가 아니라 조용한 넋두리로 우리에게 비가시화된 것을 상기해주는 듯했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전시는 전시장에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뚫어져라 응시했지만,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가를 걱정하느라 정작 작품의 물성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것 같다. 글 쓸 때 생각이 안 날까봐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보니 맨 눈으로 보았을 때보다 질료의 물질성이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카메라가 대상을 확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시장의 작품은 소금석, 흙, 밧줄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진을 보고서야 비로소 작품 제목에 담긴 질료 정보(산화철, 쪽풀, 시멘트, 석회, 천연안료 등)가 실감이 났다. 또한 이 많은 재료를 빚고 꼬고 칠하고 묶으며 형상을 만들었을 예술가의 노동이 생각났다. 내 카메라 각도에서는 담을 수 없었던 전경 사진도 나중에 작가의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알록달록 화려한 색상을 하고 있는 전시였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무균 실험실 같은 백색 공간 전시장을 배경으로 소금석, 밧줄, 흙기둥의 색상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어여쁘게 보였다. 나는 밧줄의 늘어진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혹은 매듭만으로는 당기고 조이는 역할을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면서 “기능이 탈각된” 사물을 읽었지만, 작업을 하는 몇 개월간 작가는 끈 본연의 기능대로 매듭 하나하나를 엮고 묶고 잇고 당기고 조였을 것이다. 이 매듭은 분명히 아름다운 매듭이었지, 얽지 말아야 할 것을 얽고 있는 엉킴은 아니었다. 또한 부가가치 사슬의 가장 아랫단인 소금석도 채굴과 착취의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작가가 정성껏 만든 자리에 수석의 형태로 안방마님처럼 곱게 앉아 있었고, 이 역시 현장에서보다 사진으로 더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일곱 흙기둥은 사실 폐기물과 오염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의 개인적인 사연과 기억을 담은 작품이다. 폐기물을 품고 있긴 하지만 사진으로 보는 흙기둥들은 병든 땅이 힘겹게 일어나 있다기보다는 딱 우리네 눈높이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다정하게 맞아주는 일곱 친구들 같아 보였다.

20세기 물질세계에 비추어 내가 읽어낸 물질세계의 병리 이야기가 처연하긴 했으되 왜 이 작품들이 비뚤어진 인간-물질 관계를 새되게 “고발”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사진으로 전시를 다시 본 순간은, 예술가가 만들고 소통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가장 구체적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진실, 사실, 객관성에 대하여


작가의 의도, 물질의 의미, 전시의 상징을 오해해 왜곡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 기어이 찾아내었어야 마땅할 진실의 “원 실체”를 포착하지 않은 채 나의 이야기를 덧붙인 글이 객관적일 수 있는가의 고민은, 때로는 모종의 진실에 “접점”으로만 닿아도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정당화했다. 이 또한 작가의 작품 및 그것을 구성한 물질에 대한 올바른 존중의 하나였기를, 이 또한 진실된 소통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었기를 바란다. 끝으로, 인간과 물질에 대한 깊은 탐색을 이어갈 작가의 향후 작업을 기대하고 응원한다.



[1] 이번 학기 “환경사회학연구” 강의계획서 내용을 빌려왔다.

[2] 이 단락에 나오는 히말라야 소금석 내용은 다음의 기사를 참고했다. https://www.npr.org/sections/thesalt/2019/10/03/763960436/pakistan-wants-you-to-know-most-pink-himalayan-salt-doesnt-come-from-india.

[3] Walter, Mariana, et al. 2024. “The Politics of ‘Green’ Extraction Frontiers: Mapping Metals and Mineral Mining Conflicts Related to the Energy Transition in the Americas” Critical Sociology,  https://doi.org/10.1177/08969205241305963). ‘decarbonization consensus’; 싯다르트 카라 저/ 조미현 역, 2024 <코발트 레드: 콩고의 피는 어떻게 우리 일상을 충전하는가> 에코리브르. 이 책은 “2022년 현재 깨끗한 코발트 공급망 같은 것은 콩고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국제 코발트 공급망은 콩고 장인 광부[손으로 캐는 노동자]들의 일당 1달러를 사슬의 최상위에서 분기 수익 수십 억 달러로 둔갑시키는 매커니즘”이라고 일갈했다.

[4] https://biz.chosun.com/science-chosun/nature-environment/2023/06/25/TMX3N2GIBVDKXBJEEEUYQP3NC4/.

[5] 폐기물 격리에 대한 이 단락의 내용은 2021년 6월 4일 법무법인 화우에서 진행한 “코로나 시대의 환경 보호 및 자원 순환을 위한 법제 모색” 세미나 자료집(내 발표의 발제문)을 토대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