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update : 2025.01.29.                            mminho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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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각의 아이러니한 다큐멘터리, 무척이나 얕은 이 은빛

          김맑음


“삶이여, 있는 그대로 영원하라.”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가 했던 한 선언은 삶을 있는 그대로 담고자 했던 다큐멘터리 작가들에게는 오래된 꿈이었다. 실제 삶을 얼마나 동일하게 구현하는가. 그것이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토프는 기계의 시선을 빌려 비로소 삶은 다큐멘터리 이미지 속에서 창조된다고 보았다.1) 진실된 것, 진짜처럼 보이는 것. 만져지는 듯한 현실에 가까울 것. 사람들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현실의 소리와 촉감과 움직임을 포착한다고 이야기해 왔다. 그리고 그것이 일종의 불문율과 같은 미덕이었다.

조각이 배치된 이 전시는 아이러니하게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다. 1966년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품 〈은빛 구름(Silver Clouds)〉이 설치된 화이트 큐브 갤러리 사진이다.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이 작업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배치 방식으로 설치되었겠지만, 그 당시 사진이라는 사실에서 바로 그 은박 풍선에 가장 눈길이 두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당시 설치된 은박 풍선들은 실제로 이제 없어진 것이 되었음에도 말이다. 얼핏 보았을 때, 워홀 작품은 조각을 다루고 있는 작가에게 무게적으로나 배치적으로나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남겨진 사진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서 이 진실성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한다면 결국은 사진의 은 입자에 다다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이트 큐브에 설치된 은빛의 작업은 카메라 플래시 빛과 함께 필름에 닿고 형태를 담는다. 그리고 이것을 인화지에 다시 빛으로 투사하면서 은 입자가 반응하여 ‘사진’이 남는다. 이 얇은 사진에서 진실을 견인하는 것은 결국 은 입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워홀의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또 하나의 사진은 1960년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입방체 형태의 조각이 갤러리에 설치된 사진이다. 조각의 표면은 공간을 반사하면서 마치 화이트 큐브의 공간이 연장된 감각을 제시하는 것 같다. 그 전경은 미니멀리즘 조각 전시의 형태를 사진으로 남기고 지금까지 보여주면서 동시대의 조각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시에 이는 화이트 큐브의 활용에 대한 하나의 선례로 남기도 하였다. 여기에도 은 입자는 사진에 고정되어 있다. 작업에 일종의 영속성을 부여하는 근원적인 지지체로 은 입자의 역할이 정착된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조각과 공간일지라 할지라도 말이다.

다큐멘터리 예술이 자신과 삶 사이에서, 즉 유사한 것과 진실이 갈라지는 섬세한 경계선을 끊임없이 재편하는 과정임을 떠올린다면,2) 그리고 이것을 단순히 사진과 영상의 차원으로 귀결시키지 않는다면, 조각의 다큐멘터리는 어떠한 것인지로 질문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으로,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와서 작가는 기존에 스스로 이어 왔던 조각 표면에 대한 고민을 은빛의 외피로 함께 감싼다. 조각조각 무엇인가를 은빛이 뒤덮여서 ‘은빛 덩어리’로 명명된 각각의 덩어리들은 불규칙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김민훈 작가의 이전 작업을 보았던 이들이라면, 병기된 작업 명을 보면서 그의 과거 전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보지 못하였더라도 온라인상에 그것은 이미지로 기록되어 있다. 작품의 재료도 동일하게 기입되어 있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위에 은색 필름’으로 귀결되는 은빛의 표면이다. 기존 작업에서 표면에 초점을 맞춰서 질감을 두드러지게 조각했고, 잘려 나간 단면이 더 관객의 눈으로 닿도록 은분을 사용해왔던 작가는 이처럼 이번 전시 전면에 은빛을 활용하고 있다. 이때 매끄러운 표면이 아니라 그 덧붙여짐을 눈으로 좇아갈 수 있게 말이다. 마치 이는 과거의 작업과 전시가 열린 화이트 큐브 공간을 돌아보고 어느정도 거리에서 다시 다큐멘터리적으로 포착하면서, 은 입자가 과거 조각들의 표면에 반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미니멀리즘이 사진으로 남아 영속성을 유지하고 있던 역사를 다시 비틀어, 그 은 입자를 마치 워홀의 작업 방법론처럼 무척이나 피상적으로 보이게끔 조각에 투사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의 조각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미니멀리즘과 함께 은 입자의 도움으로 그 권위를 획득하였던 화이트 큐브도 이에 해당한다. 마치 진공 상태와 같은 하얀 입방체는 마치 은 입자가 반응하는 것이 금지된 인화지와 같다. 작가는 여기에 그 화이트 큐브의 표면에 질감을 다시 입힌다. 특히나 이 표면은 수공예 기반의 장식적 표현이 극대화되었던 유럽 바로크 로코코 시기의 양식을 표방하는 대량 생산 타일이 부착되어 있다. 표면을 감추는 것과 표면을 극화시키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질감만 부여되었을 뿐, 이곳의 바닥과 벽은 여전히 하얀 입방체 형식이다. 이곳을 화이트 큐브로 말할 수 있을 것인지 이 입방체는 의문을 함께 담고 있다. 특히나 로버트 모리스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형태가 전시장 중간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화이트 큐브에 밀착되어 끊임없이 호명되었던 미니멀리즘을 다시 좌대 위에 올리면서 공간과 조각의 관계를 분리하고 있다. 시간과 함께 현대성의 권위를 얻은 조각은 고전주의 좌대 위에서 숨기고 있던 권위를 표면화하고, 주변의 은빛 조각과 공간을 어지러이 반사한다.

작가의 과거 전시에서 빗겨 서 있는듯한 이 전시는 조각과 공간의 구조를 함께 돌아보고 있다. 일련의 전시는, 특히나 조각을 다루는 전시는 일반적으로 화이트 큐브에서 조각을 배치하여 관람객을 맞이하고, 전시가 마무리되면 파란색 비닐 포장 테이프로 쌓여 작업실로 돌아간다. 외피의 켜는 벗겨졌다가 다시 덧붙여져서 기나긴 조각의 시간을 함께한다. 보이고 감춰지는 것은 반복되지만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바라보는 것은 조각의 보여짐뿐이다. 그리고 그 보여짐을 사진으로 포착한다면, 이는 수많은 전시 전경 사진처럼 어딘가에서 떠돌거나 쌓여있거나 잊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조각 전시가 응당 지나왔던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서 은 입자의 사진 이미지는 알게 모르게 조각의 수직적인 역사에서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사진을 찾기 위해 검색을 했다면 더더욱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시에서 비닐 포장처럼 얇게 덧씌워진 표면에 은빛으로 빛나는 입자는 우리로 하여금 조각의 외피에 대해서 주목하게 한다. 그리고 이 외피가 단순히 무엇인가를 감싸고 보호하고 장식하는 역할을 넘어서 외피의 정치학(politics of the envelope) 차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구조를 감싸고 있는 외피가 단순히 보호와 같은 기능을 떠나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과 맞닿아 있고, 궁극적으로 권력 구조와 사회적 관계가 역동하는 요소라고 한 건축가가 분석했던 것처럼 말이다.3) 조각의 외피는 보호와 장식의 기능을 넘어 무엇의 구조를 드러내고 있는가. 얇게 덧씌워진 표면의 은빛은 가깝게는 작가 본인의 작품을 감추고, 다음으로는 현대 조각사에서 되려 더 올곧은 권위를 세워버린 미니멀리즘을 얇은 좌대로 가르며, 나아가 화이트 큐브 역시 장식의 질감으로 덮는다. 다큐멘터리 이미지 속에서 창조된다고 여겨진 삶은, 만약 이것을 조각의 삶이라고 본다면, 실제 그것의 삶과 들러붙었다가 떼였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조각의 삶에서 보여짐은 타자가 있을 때만 가능하지만, 이 전시의 조각은 표면에 피어난 은 입자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감춤과 드러냄의 아이러니는 반복된다.

다시, 여기의 은색 덩어리와 기둥과 장식된 공간은 어딘가에 기록되고 남겨질 것이다. 카메라를 들어 찍는다. 스크린에서 사진이 추가된다. 놀랍지 않게도 그곳은 그리드 형태로 정리된 핸드폰 사진 앨범일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소로 지칭하기에는 어색하다. 오히려 그것은 검은색 스크린 위에 촘촘히 들러붙은 장식이자 외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이미지들은 꽤 오랜 시간 보관되고, 이따금 ‘김민훈 개인전 《깊게 얕은 Deeply Superficial》(다이브서울, 2025)’이라는 캡션과 함께 어딘가에서 보여질 것이다. 이 사진은 화이트 큐브와 조각을 진실로 응시하고 있는가. 표면을 포섭하려는 다큐멘터리 이미지, 그리고 그것에서 비집고 새어 나가는 조각의 다큐멘터리, 그 사이에서 이 전시는 덧붙여지는 것(overlay)에 대한 사이의 정치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조각의 아이러니한 다큐멘터리는 얇은 은빛이다. 그리고 이 역동하는 은빛 외피들 사이에서 당신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반사되고 있다.

1)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 안규철 옮김 (서울: 워크룸프레스), 165-167.
2) 같은 책, 178.
3) Alejandro Zaera Polo, “The Politics of the Envelope: A Political Critique of Materialism,” Volume 17 (2008): 104-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