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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 자른 단면, 인테리어, 장식 매듭
QF(하상현)
무게
‹Sleeper 1 (BEAM 2–1)›, ‹Sleeper 2 (BEAM 2–2)›, ‹장군 (BEAM 3–1)›, ‹신부 (BEAM 3–2)›는 혼자 들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어떤 것은 150kg가 넘는다. 무거운 조각은 제작 과정에서 위치를 조금 옮길 때 조차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기둥은 대부분의 한 사람이 옮길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기둥은 상부의 하중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기 위해 무겁고 튼튼해야 한다. 그렇기에 건물을 받치는 기둥은 물론, 콘크리트 전봇대나 평범한 통나무도 혼자 힘으로는 옮길 수 없다.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기둥의 무게를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150kg라는 숫자를 알고 난 뒤에도 김민훈 조각의 무게를 체감하긴 어렵다. 평소 들어 본 헬스장 기구의 무게를 떠올려 보면, 150kg은 바벨봉에 20kg 플레이트를 각각 3개씩, 그리고 5kg 플레이트를 각각 1개씩 끼운 무게다. ‹2022 USAPL 코리아 섬머 클래식 시즌2›에서 운동선수 루스카는 데드리프트를 한번 들고 그대로 블랙아웃으로 쓰러졌다. 데드리프트(dead lift)는 바닥에 놓인 ‘죽은 웨이트’를 들어 올리는 운동이다. 인간은 사물을 들어 올리려다 도리어 자신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바닥으로 꼬꾸라질 수 있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장군 (BEAM 3–1)›, ‹신부( BEAM 3–2)›를 처음 마주할 때 특이했던 점은 실제 무게보다 훨씬 가벼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내부가 스티로폼 쓰레기임을 (갈비뼈를 열어) 노출하며, 무거운 시멘트를 얇게 감각하게 만든다. 두 눈으로 추측할 수 있는 무게감은 때론 적극적으로 착시를 유발한다. 두 조각은 네가 기둥의 무게를 얼마나 느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곤 고개를 휙 돌리며 바닥에 끌리는 옷을 입고 도도히 사라진다.
자른 단면
인간이 사물을 ‘자르는’ 두 가지 방식이 떠오른다. 먼저 제작 초기에, 큰 단위로 재료를 자르는 방식이다. 이는 사물의 크기인 규격을 정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작은 단위로 재료를 자르는 방식이다. 이는 사물에 가학적인 힘을 가하는 것이며, (제작자의 자각과 무관하게) 특정한 의지가 담긴다. 실제로는 이 두 가지는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또 자르는 규모가 크거나 작다는 기준도 제작자에 따라 상대적이다.
김민훈은 조각을 만들 때 이러한 두 방식의 자르기 모두 좀처럼 행하지 않는다. 그는 2021년 10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조각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사적 행위에 집중한 ‹GRABO›를 진행했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에서 하루에 한 가지 동사에 집중해 조각을 제작하고 이를 기록했다. 여기서 기록된 133번의 행위 중 ‘자르기’는 단 4번 등장한다. (그는 자르기보단 깎고, 바르고, 묻히고, 붙이고, 결속하고, 꼬고, 묶는다.)
이 때문에 그의 조각에 나타난 단면은 주로 타인 혹은 사회가 대상을 자른 특정한 방식의 선택을 드러내 보여준다. ‹Strangers (BEAM 1)›은 산책에서 마주친 잘린 나뭇가지나 토막을 작업실에 가져오며 시작했다. 가지치기는 나무를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길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이윤 중심적이고, 효율적이고, 행정 편의적인 시스템에 의해 가지가 잘린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무와 인간의 관계를 살핀 선택은 보기 어렵다. 인간이 나무를 대하는 태도는,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횡으로 잘린 나무의 단면은 나이테를 보여 준다. 가학적인 자르기는 그 자체로 사물의 내부를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반면 김민훈은 나무를 자르진 않지만 나무의 껍질을 종 방향으로 대패질하고, 상처를 내는 방식으로 대상에 개입한다. 작가는 이런 행위가 일종의 애착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얼핏 보면 서로 비슷한 나무의 표면을 벗겨 낼 때 드러나는, 수종마다 다른 무늬들을 보며 놀라워했다. 관객은 각각의 나무에 별로 중요한 차이가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린 나무를 하나씩 거리에서 가져와 100시간가량 다듬은 작가에게는 그 차이가 필연적으로 드러난다. “과정이 관객에게 거의 드러나지 않아요.”라고 말한 나에게, 작가는 100시간의 노동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김민훈의 조각적인 선택이 많은 경우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여기에 메모를 남겨 둔다.
노출 콘크리트처럼 건축 재료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건물 내부는 통상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마감된다. 미술 공간의 마감은 어떻게 선택될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모델은 1929년 알프레드 바아가 발명한 ‘화이트큐브’의 마감법이다. 이는 사방에 벽면을 하얗게 칠하고, 무시간적인 백색 빛을 공간 전체에 고루 펼치며, 건물을 구동하는 각종 설비를 보이지 않게 한다.
전시가 열린 ‘아트스페이스 보안 2’의 내부 마감은 꽤 화이트큐브와 유사하지만, 몇 가지 틈새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큰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은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물체를 다르게 보이게 한다. 천장의 파이프 설비는 노출되어 있지만, 다시 백색 페인트로 가려졌다. 내부의 창고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틈 라인이나, 창밖으로 보이는 적색 벽돌과 내부의 흰 벽이 접하며 튀어나온 지점도 포착할 수 있다.
지하 2층 ‘아트스페이스 보안 3’이 건축재인 벽돌과 지면 아래 바위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반면, ‘아트스페이스 보안 2’는 벽, 천장, 바닥 모두를 백색으로 덮고, 동시에 덮어낸 사실을 몇 가지 틈새로 노출시킨다. 이 공간은 화이트 큐브의 백색을 자각하게 만들며, 드러나선 안 되는 속살을 밖으로 뒤집는다. 이런 뒤집기를 에로틱한 방식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까?
매듭은 대상을 묶는 기술이다. 옭아맬 대상의 물성, 완성 후 다시 풀어야 하는지의 여부, 묶는 힘의 정도에 따라 매듭법의 형태와 기능이 다양해진다. 실을 묶어 고정하는 바느질이나, 신발 끈을 묶는 방식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매듭법이다. 산악용 매듭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견고함과 상황에 따른 유연성이 중요하다. 반대로 포승법이나 교수형의 매듭은 인간을 무력화시키거나 죽이기 위해 사용한다. 매듭으로 문자를 만든 잉카의 키푸(Quipu)나 성적 패티시-플레이에 사용하는 본디지 매듭도 있다. 김민훈은 둘 이상의 사물을 결합할 때 다양한 매듭법을 사용해 왔다. 특히 이번에 새로 시도한 것은 한국 전통 의 ‘장식 매듭’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장식을 금기시했다.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장식과 범죄』(1897–1929)에서 장식을 범죄로 볼 정도였다. 르코르뷔지에는 이를 이어받아 1920년대 건축에서 본격적으로 장식을 파괴했다. 로스에게 장식은 과시이자 노동을 낭비하는 일이며, 새로움을 상상할 수 없게 하는 맹목적인 취향이었다. 르코르뷔지에에게는 장식이 사물의 결점을 감추는 위장술이었다. “장식은 결함을, 흠을, 모든 단점을 감춰준다.”, 반면 “좋은 물품은 잘 만들어지고, 적절하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건강하고, 벌거벗음으로써 잘 제조되었음을 드러낸다.” 산업기계로 장식을 저렴하게 복제할 수 있게 되면서, 과거에는 소수만 누릴 수 있던 장식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이들이 장식을 비난한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장식을 사물의 합목적성, 기능성, 재료의 정직성과 같은 ‘본질’에서 벗어난 무언가로 본 점은 비슷했다.
장식이 큰 영향력을 지녔던 아르누보 시대에 장식이 없는 한 양복점 건물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그 건물을 비난하며 ‘눈썹 없는 집’이라 불렀다. 이후 ‘눈썹 없는’이라는 수식어는 서구 모더니즘 건축에서 순수성의 은유가 되었다. ◼ 장식과 눈썹을 생각하니, 남성의 눈썹 그리기가 떠오른다. 눈썹은 얼굴의 인상을 크게 좌우하며, 테스토스테론이 많이 나올수록 짙어진다. 때문에 짙은 눈썹은 남성성을 보여 주는 수단이 된다.
남성의 눈썹 화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이미 인공적인 행위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이상하지만, 이것이 남성성을 조정하는 섬세한 기술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남성이 ‘남성의 기호’를 신중히 조작하고 체화하는 일은 남성성을 언제든 벗을 수 있는 장식적인 것으로 다루는 일이다. 퀴어적인 맥락에서 남성 눈썹 화장이 작동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눈썹은 언제든 그리고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얼굴 이미지를 형성하는 행위를 자주 반복하다 보면 그려진 눈썹은 자신과 쉽게 땔 수 없게된다. 또 눈썹 그리기는 반복할수록 점점 더 ‘적합하게’, ‘잘’ 그릴 수 있다. 눈썹을 그렸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수치심이 생기는 순간과 그려진 눈썹이 자신의 실제 눈썹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은 모두 중요하다.
김민훈이 전통적인 것, 특히 전통 건축의 제작법을 자신의 조각에 반영하고 노동으로 착실히 체득하면서도 자꾸 장난을 치는 것은 남성의 눈썹 그리기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수치심과 자부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전통’을 타자화하는 실천. 비슷한 조각을 두 번 만드는 것과 비슷한 행위를 두 번 하는 것은 유일한 기원이 아닌,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에로틱한 반복을 수행하는 일이다. 눈썹을 양쪽으로 그리는 것처럼.
◼ 김맑음 「조각가에게 전시가 매체가 된다는 것은 장식이 범죄를 벗어난다는 것이다」에서 인용. 해당 글은 전시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2022)에 연계된 텍스트이다.
QF(하상현)
무게
‹Sleeper 1 (BEAM 2–1)›, ‹Sleeper 2 (BEAM 2–2)›, ‹장군 (BEAM 3–1)›, ‹신부 (BEAM 3–2)›는 혼자 들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어떤 것은 150kg가 넘는다. 무거운 조각은 제작 과정에서 위치를 조금 옮길 때 조차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기둥은 대부분의 한 사람이 옮길 수 없는 무게를 지닌다. 기둥은 상부의 하중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기 위해 무겁고 튼튼해야 한다. 그렇기에 건물을 받치는 기둥은 물론, 콘크리트 전봇대나 평범한 통나무도 혼자 힘으로는 옮길 수 없다.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기둥의 무게를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150kg라는 숫자를 알고 난 뒤에도 김민훈 조각의 무게를 체감하긴 어렵다. 평소 들어 본 헬스장 기구의 무게를 떠올려 보면, 150kg은 바벨봉에 20kg 플레이트를 각각 3개씩, 그리고 5kg 플레이트를 각각 1개씩 끼운 무게다. ‹2022 USAPL 코리아 섬머 클래식 시즌2›에서 운동선수 루스카는 데드리프트를 한번 들고 그대로 블랙아웃으로 쓰러졌다. 데드리프트(dead lift)는 바닥에 놓인 ‘죽은 웨이트’를 들어 올리는 운동이다. 인간은 사물을 들어 올리려다 도리어 자신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바닥으로 꼬꾸라질 수 있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장군 (BEAM 3–1)›, ‹신부( BEAM 3–2)›를 처음 마주할 때 특이했던 점은 실제 무게보다 훨씬 가벼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내부가 스티로폼 쓰레기임을 (갈비뼈를 열어) 노출하며, 무거운 시멘트를 얇게 감각하게 만든다. 두 눈으로 추측할 수 있는 무게감은 때론 적극적으로 착시를 유발한다. 두 조각은 네가 기둥의 무게를 얼마나 느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곤 고개를 휙 돌리며 바닥에 끌리는 옷을 입고 도도히 사라진다.
자른 단면
인간이 사물을 ‘자르는’ 두 가지 방식이 떠오른다. 먼저 제작 초기에, 큰 단위로 재료를 자르는 방식이다. 이는 사물의 크기인 규격을 정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작은 단위로 재료를 자르는 방식이다. 이는 사물에 가학적인 힘을 가하는 것이며, (제작자의 자각과 무관하게) 특정한 의지가 담긴다. 실제로는 이 두 가지는 엄밀히 구분되지 않는다. 또 자르는 규모가 크거나 작다는 기준도 제작자에 따라 상대적이다.
김민훈은 조각을 만들 때 이러한 두 방식의 자르기 모두 좀처럼 행하지 않는다. 그는 2021년 10월부터 2022년 3월까지 조각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사적 행위에 집중한 ‹GRABO›를 진행했다. 작가는 이 프로젝트에서 하루에 한 가지 동사에 집중해 조각을 제작하고 이를 기록했다. 여기서 기록된 133번의 행위 중 ‘자르기’는 단 4번 등장한다. (그는 자르기보단 깎고, 바르고, 묻히고, 붙이고, 결속하고, 꼬고, 묶는다.)
이 때문에 그의 조각에 나타난 단면은 주로 타인 혹은 사회가 대상을 자른 특정한 방식의 선택을 드러내 보여준다. ‹Strangers (BEAM 1)›은 산책에서 마주친 잘린 나뭇가지나 토막을 작업실에 가져오며 시작했다. 가지치기는 나무를 건강하게 자라도록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길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이윤 중심적이고, 효율적이고, 행정 편의적인 시스템에 의해 가지가 잘린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나무와 인간의 관계를 살핀 선택은 보기 어렵다. 인간이 나무를 대하는 태도는,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횡으로 잘린 나무의 단면은 나이테를 보여 준다. 가학적인 자르기는 그 자체로 사물의 내부를 특정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반면 김민훈은 나무를 자르진 않지만 나무의 껍질을 종 방향으로 대패질하고, 상처를 내는 방식으로 대상에 개입한다. 작가는 이런 행위가 일종의 애착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얼핏 보면 서로 비슷한 나무의 표면을 벗겨 낼 때 드러나는, 수종마다 다른 무늬들을 보며 놀라워했다. 관객은 각각의 나무에 별로 중요한 차이가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린 나무를 하나씩 거리에서 가져와 100시간가량 다듬은 작가에게는 그 차이가 필연적으로 드러난다. “과정이 관객에게 거의 드러나지 않아요.”라고 말한 나에게, 작가는 100시간의 노동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김민훈의 조각적인 선택이 많은 경우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여기에 메모를 남겨 둔다.
인테리어
노출 콘크리트처럼 건축 재료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건물 내부는 통상적으로 특정한 방식으로 마감된다. 미술 공간의 마감은 어떻게 선택될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모델은 1929년 알프레드 바아가 발명한 ‘화이트큐브’의 마감법이다. 이는 사방에 벽면을 하얗게 칠하고, 무시간적인 백색 빛을 공간 전체에 고루 펼치며, 건물을 구동하는 각종 설비를 보이지 않게 한다.
전시가 열린 ‘아트스페이스 보안 2’의 내부 마감은 꽤 화이트큐브와 유사하지만, 몇 가지 틈새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큰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은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물체를 다르게 보이게 한다. 천장의 파이프 설비는 노출되어 있지만, 다시 백색 페인트로 가려졌다. 내부의 창고 공간으로 들어가는 문틈 라인이나, 창밖으로 보이는 적색 벽돌과 내부의 흰 벽이 접하며 튀어나온 지점도 포착할 수 있다.
지하 2층 ‘아트스페이스 보안 3’이 건축재인 벽돌과 지면 아래 바위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반면, ‘아트스페이스 보안 2’는 벽, 천장, 바닥 모두를 백색으로 덮고, 동시에 덮어낸 사실을 몇 가지 틈새로 노출시킨다. 이 공간은 화이트 큐브의 백색을 자각하게 만들며, 드러나선 안 되는 속살을 밖으로 뒤집는다. 이런 뒤집기를 에로틱한 방식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장식 매듭
매듭은 대상을 묶는 기술이다. 옭아맬 대상의 물성, 완성 후 다시 풀어야 하는지의 여부, 묶는 힘의 정도에 따라 매듭법의 형태와 기능이 다양해진다. 실을 묶어 고정하는 바느질이나, 신발 끈을 묶는 방식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매듭법이다. 산악용 매듭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견고함과 상황에 따른 유연성이 중요하다. 반대로 포승법이나 교수형의 매듭은 인간을 무력화시키거나 죽이기 위해 사용한다. 매듭으로 문자를 만든 잉카의 키푸(Quipu)나 성적 패티시-플레이에 사용하는 본디지 매듭도 있다. 김민훈은 둘 이상의 사물을 결합할 때 다양한 매듭법을 사용해 왔다. 특히 이번에 새로 시도한 것은 한국 전통 의 ‘장식 매듭’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장식을 금기시했다.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장식과 범죄』(1897–1929)에서 장식을 범죄로 볼 정도였다. 르코르뷔지에는 이를 이어받아 1920년대 건축에서 본격적으로 장식을 파괴했다. 로스에게 장식은 과시이자 노동을 낭비하는 일이며, 새로움을 상상할 수 없게 하는 맹목적인 취향이었다. 르코르뷔지에에게는 장식이 사물의 결점을 감추는 위장술이었다. “장식은 결함을, 흠을, 모든 단점을 감춰준다.”, 반면 “좋은 물품은 잘 만들어지고, 적절하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건강하고, 벌거벗음으로써 잘 제조되었음을 드러낸다.” 산업기계로 장식을 저렴하게 복제할 수 있게 되면서, 과거에는 소수만 누릴 수 있던 장식의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이들이 장식을 비난한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장식을 사물의 합목적성, 기능성, 재료의 정직성과 같은 ‘본질’에서 벗어난 무언가로 본 점은 비슷했다.
장식이 큰 영향력을 지녔던 아르누보 시대에 장식이 없는 한 양복점 건물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그 건물을 비난하며 ‘눈썹 없는 집’이라 불렀다. 이후 ‘눈썹 없는’이라는 수식어는 서구 모더니즘 건축에서 순수성의 은유가 되었다. ◼ 장식과 눈썹을 생각하니, 남성의 눈썹 그리기가 떠오른다. 눈썹은 얼굴의 인상을 크게 좌우하며, 테스토스테론이 많이 나올수록 짙어진다. 때문에 짙은 눈썹은 남성성을 보여 주는 수단이 된다.
남성의 눈썹 화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이미 인공적인 행위에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이상하지만, 이것이 남성성을 조정하는 섬세한 기술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남성이 ‘남성의 기호’를 신중히 조작하고 체화하는 일은 남성성을 언제든 벗을 수 있는 장식적인 것으로 다루는 일이다. 퀴어적인 맥락에서 남성 눈썹 화장이 작동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눈썹은 언제든 그리고 지울 수 있다. 하지만 얼굴 이미지를 형성하는 행위를 자주 반복하다 보면 그려진 눈썹은 자신과 쉽게 땔 수 없게된다. 또 눈썹 그리기는 반복할수록 점점 더 ‘적합하게’, ‘잘’ 그릴 수 있다. 눈썹을 그렸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수치심이 생기는 순간과 그려진 눈썹이 자신의 실제 눈썹과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은 모두 중요하다.
김민훈이 전통적인 것, 특히 전통 건축의 제작법을 자신의 조각에 반영하고 노동으로 착실히 체득하면서도 자꾸 장난을 치는 것은 남성의 눈썹 그리기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수치심과 자부심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전통’을 타자화하는 실천. 비슷한 조각을 두 번 만드는 것과 비슷한 행위를 두 번 하는 것은 유일한 기원이 아닌,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에로틱한 반복을 수행하는 일이다. 눈썹을 양쪽으로 그리는 것처럼.
◼ 김맑음 「조각가에게 전시가 매체가 된다는 것은 장식이 범죄를 벗어난다는 것이다」에서 인용. 해당 글은 전시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2022)에 연계된 텍스트이다.